12시 30분
- 2018년 9월 9일
- 4분 분량
w.꽝아
그러니까, 우리는 꽤 좋은 이별을 했다고 생각했다. 마음처럼 되지 않는 말이, 혹은 시간이 지나면서 원래는 상처가 될법한 말들을 익숙하게 꺼내는 것이 더욱 서로에게 파고들기 전에 이별한 것은 잘한 거라고. 각자의 길로 돌아섰을 때만 해도 분명 나는 웃었다. 그리고 역시 이기광도 웃었다. 하지만 그렇게 돌아서고 난 뒤 며칠 후 이기광을 다시 마주했을 때 무언가 잘못된 걸 알았다. 어째서 넌 지금 그렇게 울 것 같은 표정인데.
3일 전 마주친 이기광의 표정은 지금까지도 너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래서 이별 후 나름 담담하게 살았던 내 생활의 규칙이 점점 깨지고 있었다. 3일에 한 번꼴로 마시던 커피는 하루에 한 잔씩, 거의 안 보던 텔레비전은 거의 내내, 그리고 오늘은 밤낮이 바뀌었다. 눈을 뜬 게 3시가 훨씬 지나친 걸 알자마자 난, 이게 뭐 하자는 건지 싶었다. 왜 이기광을 중심으로 내 생활이 돌아가는 건지.
나는 헤어짐에 있어서 별로 미련을 두는 편이 아니었다. 만났던 사람이 누구든 간에, 헤어지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편이 나 자신에게도 상대방에게도 좋은 거니까. 그래서 지금까진 헤어져도 별 타격이 없었다. 가끔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는 거고, 말 그대로 그건 다시 만나고 싶다는 미련이 아니라 생각일 뿐이었기에 그대로 두면 알아서 승화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상대방을 잊어가는 것이었고. 그래서 지금 난, 이해가 가지 않는다. 고작 우는 모습을 봤다고 내 생활이 이렇게 무너지는 것이.
날 찾아온 이기광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찾아온 건 둘째 치고 왜 내 앞에서 그런 표정을 지은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헤어질 땐 그렇게 웃었으면서. 아무런 미련 없다는 듯이 웃었으면서. 게다가 3일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 우리는 누구도 헤어지자는 게 아닌,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이별이었다. 한 마디로 자연스러운 이별. 시간이 지나갈수록 권태기인 것을 알았고 서로는 그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결코 일방적인 게 아닌 이별. 그래서 더욱 이기광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랜 시간을 함께했기에 더더욱.
이기광은 내가 제일 잘 안다고 자부했다. 친구로 지낸 지 3년, 연인으로 지낸 지 5년으로 모두 8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했으니까. 이기광도 역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우린 서로에게 친구였고, 연인이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아는 이기광은 자신을 숨기는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으면 곧바로 말하고, 또 풀려고 했다. 그건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고. 따라서 내가 모르는 이기광이 있다면, 그건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그 뒤로도 쭉 이기광은 생각이 났다. 밥 먹을 때도, 샤워할 때도, 심지어는 꿈에 나온 적도 있었다. 왜 이렇게 생각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게 특별한 이기광이었지만, 이별이 특별한 건 아니었는데. 누구나 겪는 흔한 이별이었고 이기광과 나도 그 이별과 별다른 게 없었는데. 그런데도 여전히 이기광은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나도 이런 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잊히겠지, 잊히겠지 했는데 아무리 노력해봐도 잊히지가 않았다. 지금 이런 내가, 너무나도 낯설었다.
이기광이 찾아온 지 일주일째,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아직 이기광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건 자연스럽다고, 서서히 잊혀가는 거라고 생각했던 나였지만 그랬던 내가 무색하게 지금 이러는 게 너무 괴로웠다. 분명 그전까진 미련도 없었고, 그냥 생각나는 대로 살아갔던 나였는데, 왜 이기광만 한정해서 이러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수저를 두 개 놓는 것은 기본에, 잘 먹던 밥은 어느 순간부터 잘 안 넘어갔고 마주 앉아있는 의자의 빈자리는 갈수록 점점 커졌다. 술은 마시지 않았지만, 하루만 그럴 줄 알았던 밤낮은 완전히 뒤집혔고 원래 해야 할 일을 못 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내 앞에서 울 것 같은 표정을 보이는 이기광은 선명해져 갔다.
내 생활이 이기광을 기준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기광이 나를 찾아온 지 3일 후 그랬던 것은 비교도 안 될 정도였다. 이기광이 아닌 다른 소음들이 내 귓가에 울리는 것이 싫어 텔레비전도 꺼놨고, 그 외에 들릴 수 있는 소음은 최대한 모두 차단했다. 그거는 그거대로 미칠 지경이었지만 차라리 그게 나았다. 억지로 잊어가는 건 내 방법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나 자신을 잘 알았고, 이러면 언젠가 잊힐 거라고 확신했다. 이기광이 다시 나를 찾아오기 전까지는.
정확히 한 달 후, 이기광은 나를 다시 찾아왔다. 나는 현관문에 달린 구멍 틈새로 이기광인 것을 봤으면서도 문을 열어줬다. 오랜만에 보는 이기광은 전보다 훨씬 얼굴이 수척했고 살도 많이 빠져 있었다. 그때 본 울 것 같은 표정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 떨어졌다. 난 그걸 다 보면서 눈물을 닦아줄 생각을 못 했다. 아니, 보자마자 아무 생각이 안 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보면서 한참 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정확히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서로를 그리워했던 것을.
나는 왜 다시 찾아왔냐고 묻지 않았다. 이기광도 거기에 대해선 아무 말이 없었다. 마치 헤어지기 전처럼, 마음이 가는 대로 연인처럼 굴었지만 그 얘기에 대해선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떠들다가도 이따금 찾아오는 정적에, 우리는 항상 침묵했다. 나는 솔직히 조금 궁금했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이 판도라의 상자는 내가 열 자신이 없었기에. 아마 이기광도 나랑 같은 생각이 아닐까 싶다.
지금 우리의 관계는 뭐라고 정의 내릴 수가 없었다. 연인답게 굴었지만, 누구도 다시 시작하는 말이 없었기에 친구라고도, 연인이라고도 할 수가 없었다. 친구라기엔 키스를 했고, 연인이라기엔 그전처럼 많은 것을 털어놓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내가 이기광한테 가지는 감정이 뭔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특별한 게 아니라 애매하게 다정하게 굴고, 또 애매하게 화를 내려다 말았다. 그리고 이기광도, 나와 같았다.
아마도 이런 애매한 관계는 쭉 우리를 옭아맬 것이다. 이건 이기광이 다시 우리가 살던 집에 찾아왔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한 거였다. 우리는 쭉 이렇게, 애매한 친구도 아닌 연인도 아닌 관계로 지낼 것이다. 누구도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않는 채로.
그렇게 이기광과 애매한 관계를 유지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좋은 이별이라고 생각한다. 서로를 향하는 말이 더욱 독을 품기 전에 헤어진 것은 잘한 거라고. 그 생각은 여전히 변한 게 없고, 우리의 관계도 여전히 똑같았다. 하지만 딱 한 가지 변한 게 있다면, 우리는 이별이 아니라 헤어지는 중이라는 것. 그거 딱 하나라고, 요섭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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