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수 없지 뭐
- 2018년 9월 9일
- 15분 분량
last forever
w.복숭아
원래 천재의 어깨에 얹힌 짐이란 무겁디무거운 법이다.
범인이 감내할 수 없는 무게를이고 있는 고독한 인재랄까, 뭐 그런 거 아니겠니.
아니 내가 뭐 원해서 그렇게 태어났나. 날 때부터 지능이 높았던걸, 본디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깨우치는 뇌구조였던 것을 어찌하리. 원래 우월하고 뛰어난 재능이란 당사자의 의지와는 전연 관련이 없는 법이렷다.
선천적으로 머리가 좋다는 걸 남들에게 들키는 순간 끝장이 난다. 어디 동네에 무슨 천재가 발굴됐더라, 시기와 경탄이 뒤섞인 소리가 돌기 시작하면 집집마다 소문나는 정도를 넘어 국가에서 불을 켜고 달려들기 때문이다. 준형은 딱 전형적인 케이스였다. 어렸을 때부터 물리와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덕에 인재 양성에 안달이 난 국가에게 컨택되었고 그 후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그 시기 즈음에 발견된 또래보다 한 가지 나은 점이 있다면, 준형의 가家가 대대손손 내려오는 엘리트 가이드 집안인 터라 쏟아지는 매스컴의 취재는 피할 수 있다는 것이랄까.
여하튼 본인 의지와는 상관없이 바르고, 건실한, 나라를 위해 남들보다 뛰어난 두뇌를 굴려야만 하는 인재로 선택된 준형은,
“날씨가아 존나게에 좋네에.”
그러얼 생각이이 존나게에 없었다.
“눈부셔랗.”
고독하기에 존나 놀고 싶은 인재, 뭐 그런 거 아니겠니.
원래ㅡ 천재의 어깨에 얹힌 짐이란 무겁디무거운 법이다
……라고 했었지?
아쉽게도 준형은 본인의 인생에 걸쳐진 짐덩이 조차도 해결하지 못하며, 안 하며, 어떻게 강제로라도 해볼라치면 아이고 나는 못 하오 하며 드러눕는 인간이었다. 그런 그에게 어딜 누가 누구의 짐을 얹히려 들던가. 원하지 않은 책임을 성실히 수행할 성정 따위는 이미 다섯 살 무렵 떡국에 열심히 말아먹었으므로 준형은 그저 최대한의 도피처를 통해 줄행랑을 치고 있었다.
‘내가 지금 이런 거나 연구하고 있어야겠냐?’
‘남들이 들으면 배 아파서 떼굴떼굴 굴러요.’
그런 준형을 두고 혁수는 이렇게 평하더이다. 집안 좋아, 때깔 좋아, 심지어 머리도 타고난 주제에 가이드 능력까지 가져간 남자가 은신처를 찾고 있다는 걸 백분 이해하지 못하는 말이었다. 준형은 제게 주어진 환경에 지나치도록 무심했다.
‘그럼 지들이 타고나든가.’
건성으로 서류를 넘기며 그렇게 대답했던가. 혁수는 들리지 않게 저 평범한 사람은 절대 이해 못 해줄 재능충새끼 라며 씨근댔지만 들리지 않을 혼잣말이었다.
어김없이 출근하는 길이었다. 연구실 옆에 별도로 마련된 기숙사에서 겨어우 일어난, 아니 사실은 눈을 뜬 지 한참은 지났지만 몸이 무거워 움직이기 힘들다는 이유로 몇 시간을 침대 위에서 구르던 준형이 느릿하게 걸었다.
날씨는 너무나 좋고,
“……”
휴대폰은 계속해서 울린다.
늘상 지 좆대로 행차하셨다가 꼴릴 때 사라지시는 터라 원래 불규칙한 출퇴근 시간에, 업무용 휴대폰에서 불이 나고 있었다. 제발 연락 좀 제때 받으시라는 혁수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히 들리는 듯하다. 휘파람을 불며 연구실이 있는 센터 건물로 향하던 준형이 결국 쉴 새 없이 울려대는 휴대폰에 멈춰 섰다.
“진짜 집착남 새끼…”
부재중 남겨놓으면 어련히 알아서 전화하실까. 그 잠깐을 참지 못하고 보채는 꼴이란. 매일같이 전화를 놓지 못하는 꼬라지를 보아하니 애인에게도 매일같이 혼날 만큼의 집념을 가지고 있는 놈이로다. 얘는 선배를 대하는 태도가 글러먹었다며 혀를 쯧쯧 찬 준형이 뒤이어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선배 큰일났어여 ㅠㅠㅠㅠ 신입생 폭주 ㅠㅠㅠㅠㅠ]
“……”
뭐… 어쩌라는 건지.
[기절ㄱㄱ]
준형이 업무용 휴대폰으로 답을 준다는 건 이제서야 출근한다는 뜻과도 일맥상통한다. 제 답장을 바로 확인한 건지 줄곧 준형을 괴롭히던 진동이 끊겼다. 현장에서 부리나케 뛰어오고 있을 후배 녀석 따위야 제 알 바가 아니라는 듯, 준형은 늘어지도록 내리쬐는 햇볕을 만끽하며 천천히 걸었다. 거참, 산책하기 딱 좋은 날씨로구만.
이었는데ㅡ
“야야야. 아퍼.”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마냥 끌려가고 있다. 연구실에 도착해 여유롭게 가운을 걸치자마자 쾅ㅡ! 소리와 함께 문을 열어젖힌 혁수가 단번에 제 가운 깃을 쥐었기 때문이다. 와중에 하이? 건넨 제 인사는 무참히 묵살당했다. 거참 몇 번 연락 씹었기로서니 서운한 응대가 아닐 수 없다. 뭐가 그리도 급하게 뛰어왔는지 숨을 고르는 혁수의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가득 맺혀 있었다.
“선배 진짜 비상이란 말이에요.”
“기절시키면 되잖아.”
“아니 그게 뭐 아무나 됩니까?!”
이건 필히 준형의 문제다.
가이딩 따위는 하지 않는다고 준형이 못을 박은 터라 공식적으로 행하지는 않고 있으나, 폭주한 센티넬을 단번에 기절시킬 수 있는 가이드는 흔하지 않다. 그마저도 S급 센티넬은 시도도 해볼 수 없을뿐더러 끽해봐야 A급, B급이었다. S급을 제압하는 건 고도의 훈련을 밟은 숙련된 가이드이거나, 타고난 능력치가 높거나. 준형은 유전자의 힘으로 두 가지 모두 가진 이었지만.
“왜 지들이 사고 쳐놓고 나보고 수습하라고 지랄?”
“그게 아니라…!”
“이래서 말단이 젤 불쌍하지. 어휴 시바 서러워.”
수혁이 성을 내도 준형은 이해를 못 했다. 전형적인 내가 하는데 왜 못해의 타고난 천재형 스타일인 준형에게 화를 내는 건 어쩌면 무용지물일지도 몰랐다. 괜한 에너지 소모다 싶은 혁수가 그저 입을 꾹 물고 준형을 끄는데 애썼다. 빽도 좋고 일도 잘하는 데다 타고나기까지 한 제 선배의 문제점이 있다면, 그렇게 잘난 사람의 단점이라면, 그건 바로, 연구만 일을 안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무용지물이다. 그리고 불쌍하긴 개뿔 보모 노릇을 하는 제가 제일 불쌍했다. 시부럴.
-
“아 아직도…”
혁수는 망연자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훈련장에는 꽤 많은 인원이 모여 있었다. 개중에는 평상시에는 얼굴을 잘 드러내지 않는 간부들마저 여럿 있었고, 훈련을 통제하는 민간 가드들도 혼란에 빠진 듯 불길 근처를 서성였다. 거의 눈코 뜰 새 없이 끌려온 준형은 매운 연기와 함께 몸을 덮치는 더운 열감에 미간을 찌푸렸다.
“……”
거센 불길이 모두를 삼켜버릴 듯 타오르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택도 없는 진화작업이 한창이었고, 센터 내에 있는 가이드가 총동원된 건지 아는 얼굴들은 모두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천장을 높게 설계한 훈련장임에도 불구하고 천장을 새까맣게 태워버릴 듯 강하고 거센 불길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혁수가 준형의 팔뚝을 잡으려던 차였다. 저 중앙에, 어렴풋이 보이는 사람 인영이 바로 그 신입 센티넬이라 덜덜 떨리는 턱으로 말하려던 차였다. 그리고 그것보단 준형의 판단이 더 빨랐다. 혁수의 손이 닿기도 전, 앞서나간 준형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무엇을 할 줄은 예상할 수 없었으나 쉬이 붙잡기도 어려웠다. 갑작스레 등장한 연구원의 등장에, 그리고 대뜸 불길로 덤비는 무모함에 주위가 술렁였다.
“…아…!”
순식간에 그의 앞에 당도한 준형이 가까이 붙어 섰다. 제 코끝에 간신히 걸려있던 안경을 벗어버림과 동시에 센티넬의 허리를 감았다. 곧바로 힘을 주어 끌어안는 통에 충돌에 움찔, 경련한 센티넬이 밀어내려는 듯 두 팔을 들었다. 틈을 주지 않고 고개를 비틀며 입술을 부딪쳤다. 두 입술이 맞붙었다. 준형 쪽에서 일방적으로 혀를 섞는 키스였다.
갑작스럽게 행해진 가이딩에 당황한 듯 센티넬이 악력을 썼다. 허리를 감고 있던 준형의 손에서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던 안경이 툭, 땅으로 떨어졌고 동시에 준형이 한 발자국 다가서며 깊게 입을 맞췄다. 제 품 안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던 센티넬의 힘이 점점 빠지고 있었다. 이제는 대충 정신을 차리는 듯 조금씩 발꿈치를 옮겨 뒷걸음질을 친다. 우지끈,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경쾌히 울렸다.
그와 동시에 멎을 줄 몰랐던 화염이 순식간에 줄어들기 시작한다. 반쯤 감긴 눈을 슬쩍 들어 주위를 살핀 준형이 허리를 감은 손에 다시 한 번 힘을 줬다. 힘없이 딸려오는 몸이 빈틈없이 맞붙는다. 결국 어깨를 짚었던 손이 힘을 잃고 툭, 떨어졌다. 마지막까지 아랫입술을 빨아들인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아.”
“……”
“존나 뜨겁네.”
센터를 잿가루로 만들어버릴 불길을 만들어낸 것치고는 품 안의 체구가 작다. 이미 준형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서있을 힘마저 상실한 듯 중심을 잃고 쓰러진 센티넬이 준형의 어깨에 고개를 처박았다. 그대로 다리가 풀린 듯 스르르 밑으로 쓰러지려 하는 통에 엉겁결에 다시금 허리를 잡아챈 준형이 얼빠진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혁수에게 고갯짓했다. 뭐 그리 대단한 것을 봤다고 입을 벌리고 있다.
훈련장은 정적에 휩싸였다. 준형은 이미 센터 내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유명 인사였고, 실상은 타고난 가이드였으나 연구원으로 둔갑 아닌 둔갑을 하고 있었고, 그가 가이드라는 사실은 굳이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두 처음 목격한 준형의 가이딩 현장에 모두 숨을 죽였다. 준형이 벌써부터 지끈 해져 오는 눈을 꾹꾹 눌렀다. 물론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으나 벌써부터 종적을 감춘 간부들이 신경 쓰였다. 아마 보고가 들어갈 테다.
오랜만의 가이딩에 준형의 몸에도 잠시 소름이 일었다. 내일은 근육통에 시달리겠군. 얘도 장난 아니네. 몸을 물리며 그런 생각을 했다.
“나 간다.”
그대로 제 품의 센티넬을 넘겨준 준형이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대로 기숙사로 들어가며 한 생각은 그을린 가운을 바꿔야겠네, 뭐 그 정도였다.
-
제 앞으로 쌓인 연구가 한가득이지만 모두 미룬 채 놀고 있는 기분이란!
아니, 단순히 ‘논다’라고 정의하는 건 거친 표현이다. 준형은 놀고 싶어 비행 아닌 비행을 저지르는 게 아니었다. 그저 저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자로 잰 듯 바를 정正을 그리고 있어 맞춤형 기행을 저지르다 보니 그리된 것이었다. 기행이 비행이 된 것은 따지고 보자면 준형의 탓이라기보단 준형의 가문 내력이 그리했다고, 준형은 늘 항변했다.
센티넬과 가이드는 일반 시민과 격리되어 관리된다. 마치 기계처럼 기호와 숫자로 구분되어 엑셀에 차례대로 적혔다. 기계처럼, 이 아니라 기계일지도 몰랐다. 모든 삶이 통제되는 순간부터 천편일률적인 삶을 살아야 하다 보니 준형은 엇나가기를 택했다.
유니폼 대신 보란 듯이 무늬가 크고 화려한 셔츠를 입었으며, 형식적으로 주어지는 가운을 꼭꼭 챙겨 입었다. 훈련장에 들어설 때에는 거슬린다며 가운을 입지 않는 게 대부분의 연구원이었으나 준형은 답답해도 꼭 가운을 고수했다. 절대로, 연구원의 지위를 벗어나지 않겠다는 무언의 항의이기도 했다.
안 한다고요
그걸 왜 해요.
뭐가 중요한 건데요.
제게 가이드를 강요하는 가족에게 그렇게 대들곤 했다. 그마저도 올곧게 반항아적 모드로 일관하는 준형에 가족들이 이젠 나가떨어졌다시피 했으니 말이다.
먼저 센터에 입소한 센티넬과 가이드는 마취주사를 맞는다. 온몸에 약기운이 퍼짐과 동시에 정신을 잃고 깨어나면 모든 검사가 끝나 있었다. 보통 센터에 입소하는 나이는 스무 살이었으니,
그 탁월한 재능과 능력에 중학교에 입학하기도 전, 준형은 이미 가이드에 대한 전반적인 교육과 기본 훈련을 마친 상태였다. 어렸을 때에는 생각 없이 끌려가 훈련을 받았으니 그게 옳은 일이며, 제게 주어진 임무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준형이 이상함을 느낀 건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무렵, 훈련하는 센티넬을 보고난 이후였다.
센티넬은 연구원과 가이드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그 능력을 활성화하고 조절하는 연습을 배운다. 능력이 발휘되는 건 오로지 그들의 손에 의해서였다. 방탄복을 입은 채 꼭두각시처럼 훈련을 하거나 제 몸마저도 남에게 종속당하는 행위를 두 눈으로 보고 있자니 역겨움이 차올랐다. 호르몬 분비를 위해 센터에서 특별히 제작한 기계를 팔다리에 붙이고 있는 꼴이, 그리고 겨우 훈련장에 끌려 나와 가이딩에 의지해 부르르 떨고 있는 꼴이, 기계를 오프한 후에야 겨우 숨을 몰아쉬는 꼴이 결코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준형은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제일 먼저 택한 건 해외 도피였다. 이민을 결심하고 해외로 도망쳤을 때, 준형은 온 힘을 다해 제게로 덤벼드는 공권력을 경험해야 했다.
이후부터 준형은 자발적인 입소를 택했다. 기존 가이드로 입소 예정이었던 데이터를 지우고 연구원으로 직책을 바꾸었다. 서당 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그 가문에서 나고 자란 짬에 타고난 머리로 대충 공부를 하니 시험도 무사히 치르기는 했다. 다만, 제 선택을 절대 탐탁지 않아 하는 부모의 압박을 견뎌야 하는 게 흠이기는 했다.
어찌 됐건 준형이 센터에 입소 후 단 한 번도 가이딩을 한 적 없었다. 가이딩이 아니어도 센티넬을 컨트롤할 수 있는 방법은 충분했다. 굳이 희생정신을 내세우면서까지 제 몸을 축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라는 이유를 내세우면 일단 센터 내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저짝센티넬이뒤지든말든고급인력인내가알바냐쓰레빠냐의 태도로 일축하는 준형을 설득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가까운 혁수가 보채면 대충 시늉이나 하다가 딴청을 피우는 게 다였다.
그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 나면 익히 제 능력을 알고 있는 부모에게 끌려간다. 잔뜩 흐트러진 셔츠에 대충 가운을 걸친 준형이 제 몫의 주스를 마셨다. 언제까지 그놈의 연구원 노릇을 하고 있을 것이냐며 성을 내지만 수석연구원인 준형의 지위를 쉽게 박탈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가이딩을 하고 싶지 않아 부지런히 연구에 매진했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좋은 성과를 얻고 있었다.
“너 이 녀석 나이는,”
“당연히 헛으로 먹었죠. 제가 그걸 왜 합니까.”
준형이 히죽 웃는다.
“아부지두 아시잖아요.”
어쩔 수 없어요. 시간이 맘대로 지나쳐가 슬퍼하기도 바쁜 인생이란 말임다. 준형은 입버릇처럼 중얼거린다. 굳이 복잡한 제 속내까지는 들키고 싶지 않았다.
-
등장인물. 센터장과 연구원 용준형.
배경. 센터 본관 5층 중앙, 심지어 로비.
준형이 끌려온 연유는 간단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늦은 출근을 하고 있다가 글쎄, 센터장에게 딱 걸려버린 것이 아닌가. 일부러 점심시간 산책을 즐기는 간부들을 피해 그 주변의 시간대에는 출근을 피하는ㅡ보통 그것보다 더 늦게 출근하는 편이다ㅡ준형인데, 하필 또 요즘 지나치게 날씨가 좋아 그런지 센터 앞 그럴싸하게 꾸며놓은 화단 앞을 바라보던 센터장과 두 눈이 마주쳐버린 것이다.
“……”
“……”
익히 얼굴을 알고 있는 두 사람의 사이에서는 별말이 오가지 않았다. 다만 준형이 먼저 고개를 피하고 연구실로 들어가려던 차에,
“들어와라.”
먼저 선수를 친 건 센터장, 아니 제 아버지였으며
“…예에.”
무기력하게 대답한 건 이 시대의 한량, 아니 아들 용 씨였다.
제 아비는 굳이 방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고분고분하게 따라온 제 아들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더니만, 승강기에서 따라 내리자마자 납득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준형은 지난날의 제 선택을 후회했다. 걸려도 단단히 잘못 걸렸다. 답장하지 말 걸. 혁수의 문자를 보자마자 바로 기숙사로 튀어가 문고리를 죄 걸어 잠근 채 답신을 하지 말 걸 그랬다.
“앞으로 S-330은 네가 맡아라.”
걔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싫은데요.”
꿈틀, 제 아비의 심기 불편한 표정도 이제는 무섭지 않은 깡을 가지게 된 준형이다.
텅 빈 로비는 두 남자의 목소리만 공허히 울리고 있었다. 잠시 표정을 굳힌 남자가 저를 향해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렸을 때 몇 번 들어본 적 있는 굴곡이다.
“죽을 뻔했잖니.”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적어도 훈련장 내에 아무도 없었다.
“그것도 모르고 가이딩 한 건 아닐 거 아니냐.”
단단하고 차분히 어르는 말씨였다. 준형은 그를 등진 채 잠시 그때의 기억을 상기했다. 그랬다. 분명 그 센티넬은 생사의 길을 넘나들고 있었다. 진압하지 못하는 가드들과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수명의 가이드들이 그 역할을, 아니 그 센티넬을 감당하지 못한 탓이었다. 아마 준형이 가이딩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폭발할 듯 치솟는 감각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리고 제가 만들어 낸 화염 속에서 불타 죽었을 것이다.
결론이 도달하는 시간은 빠르지 않았고, 순간의 판단력보다 앞선 건 이성이었다. 가이딩을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처음으로 시도한다면 이런 류의 귀찮은 일들이 따라올 것이라는 걸 준형은 분명히 알고 있었고, 알고 있음에도 달려들었다. 그리고 제 아비는 혈육의 존재를 증명하듯 모든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 애는 이미 각성한 후로부터 능력 제어를 하지 못해 생명을 깎아먹고 있어. 너도 찾아봤겠지만, 초기에 능력이 약했다가 점차 강해졌다는 건 그 애의 무한한 잠재력을 의미하는 동시에 짧은 수명을 의미하기도 한다. 컨트롤 되지 않는다면 말이지.”
“……”
“지금 센터 내에서 그 애를 제어할 수 있는 장치, 사람, 기술 중에 갖춰진 건 아무것도 없어. 비단 능력의 문제만은 아니야. S-330은 능력을 사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오감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테스트를 해봐야 알겠지만.”
이런 감정놀음 따위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했는데. 대답할 마음도 없었지만,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말하는 제 아비의 목소리가 어쩐지 근심에 젖어 있었다. 준형은 아무런 장식도 없이 회색빛으로 이루어진 벽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걔만 할 겁니다.”
“해주겠니?”
“다른 센티넬 맡기시면 걔도 쫓아내버릴 거예요.”
어쩌면, 이미 예견된 결과일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이런 걸 하고 싶지 않았다는 건데. 준형은 싸한 한숨을 내뱉었다.
-
어쨌든 쭈뼛쭈뼛 등장하기는 했다. 준형은 출근하자마자 제 연구실 앞에 당도한 그 낯익은 얼굴에 짐짓 미간을 찌푸렸다. 그 남자는 멍하니 서 있다가 저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표정이 꽤나 환해지며 말이다. 그 인사에 대충 상황 파악이 된 준형은 벌써부터 몰려오는 피로감에 눈을 꾹꾹 눌렀다.
“안녕하세요.”
“네.”
무심히 대답하며 휙 지나쳤다. 첫째는 꺼지라는 의미고 둘째도 꺼지라는 의미다. 그 남자는 어정쩡하게 서있을 뿐이었다. 최대한 사무적으로 대해야 한다. 준형은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애초에 준형은 센터 불순응 인간인지라 체온이 맞붙고 살결이 맞붙으면 다른 이들과 달리 어떻게든 정이 붙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된다면 준형의 머지않은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게 분명했다.
이미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검사 기록을 훑어본 준형이 버릇처럼 안경테를 올리다가, 집히는 무게감이 없어 잠시 멈췄다. 그러고 보니 그 안경….
“훈련 많이 해요?”
“네? 네.”
“줄여요.”
다짜고짜 말하는 말투에 제법 당황한 듯했다. 앞뒤 자르고 본론부터 말하는 성격은 도무질 고쳐지지 않았다. 사실 그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고 준형이 조정할 예정이었으니 알아두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준형은 미리 출력되어 있는 기록을 바라보며 흘끗,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330……이 아니라, 뭐라고요?”
그 남자에게서 의문의 빛이 떠올랐다. 보통 이런 걸 묻지 않으니까.
“……기광이요. 이기광.”
이름은 이미 인적 사항란에 적혀 있다. 잠시 당황하는 낯빛이던 그는 천장을 주시한 채 멍하게 내뱉었다. 어찌 됐건 태어난 이래로 제일 많이 들었던 게 이름일 텐데, 센터에 입소하는 순간 완전히 망각하는 모습을 보는 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그래요. 난 G-1219번 아니고 용준형이니까,”
“이름 불러도 돼요?”
통성명을 하는 것도 꽤나 오랜만일 테다. 센터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센티넬과 가이드, 연구원까지 센터 신분의 모든 이들은 이름을 잃는다. 관리라는 명목하에 급과 포지션에 따라 영문명과 숫자가 이름을 대신하는 것이다. 준형은 그것을 소름 끼치도록 싫어했으며 혁수조차도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물론, 훈련장에서도 거침없이 이름을 불러재껴 뒷수습하는 건 늘 혁수의 몫이었다.
“네 저는 돼요.”
“밖에 서는요?”
“불러요.”
준형은 그저 어깨를 으쓱이기나 했다.
“…안 된다던데.”
“좆까라 그래.”
기광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준형은 짐짓 눈가를 찌푸린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취침-훈련을 반복하는 이들에게 웃을 일은 그다지 존재하지 않는다. 더구나 센티넬과의 가까운 접촉도 너무나 오랜만이었던 지라 기광의 웃음이 생경하게 다가온 탓이었다.
준형은 팔을 뻗어 연구실의 소파를 가리켰다. 어정쩡하게 서있던 기광이 제 손짓에 따라 앉았다. 차트와 볼펜을 챙긴 준형이 그를 마주했다. 인생의 모토가 한량이라지만, 어찌 됐건 남의 몸뚱어리를 책임지게 되었으니 신경은 쓸 작정이었다. 연구만 할 줄 알지 그 외의 것은 어쩜 이렇게 안 하냐며 투정하던 혁수가 알게 된다면 기함할 일이기도 했다.
“동갑이니까, 반말하세요.”
“……어.”
준형이 따라 웃어보았다. 이미 걸음을 내디뎠고, 돌이킬 수 없었다.
-
휴식을 취하던 와중이었다. 정신을 잃은 기광을 연구실로 데려온 준형이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기광에게 입술을 눌렀다. 그러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차리는 기광이었다. 그저 가이딩의 한 장면이었지만, 왠지 이런 과정이 낯부끄럽다고 생각했다.
“기광아.”
“어?”
“너 폭주할 때……”
대번에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모르긴 몰라도 제 상태가 여타 다른 센티넬과는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준형은 차트의 기록을 훑다가 슬쩍 눈을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기광은 처음 센터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S급, A급, B급 중 B급으로 취급되던 센티넬이었다. 그저 그런 센티넬의 등장에 검사를 할 때가지만 해도 의례적으로 시행했다고 했다.
한번 부여받은 등급은 대게 변하는 일이 없다. 오히려 높은 강도의 훈련량에 나가떨어지거나 능력이 발화되면 모를까, 거의 고정불변이나 다름없던 체계에 기광이 지각변동을 일으킨 것이다. 기광은 센터에 들어선 이후, 일주일 만에 A급으로 승격했다. 그뿐이랴, S급을 부여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센터 내 가이드들이 총출동해도 막지 못하는 상태까지 이르렀다. 그야말로 통제 불가 상태였다. 그의 몸을 다시 한 번 검사해 볼 필요가 있었다.
“존나 세네.”
“……뭐어?”
굳이 위험한 말은 않았다. 기광이 알아봤자 하등 좋을 것도 없었을뿐더러, 준형이 계속해서 지켜본다면 그럴 위험은 적었으니까.
“폭주할 때 기억은?”
“그냥 조금?”
“내가 가이딩 했을 때 느낌이 어땠어?”
“잘은 기억이 안 나는데, 눈앞이 하얗게 변하고 몸에 중심도 잘 안 잡혀서 겨우 서있던 것 같아. 근데 갑자기 누가 나를 잡았고……”
“잡았고.”
“……”
“그리고?”
기광이 잠시 고개를 숙이며 머뭇거렸다.
“…가이딩 했잖아.”
“그래. 키스했지.”
그런 취미가 있는 건 아닌데, 태어나서 처음 겪는 가이딩에 영 서툰 기광을 놀리는 재미가 제법 있었다. 보통의 센티넬들은 가이딩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멀어졌던 감각 혹은 증폭되었던 감각이 보통의 상태로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뭘 생각하는 건지 얼굴이 붉어진 기광이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왜.”
“아니야.”
“……”
아닌 게 아닌데.
준형은 꽤 참을성 있게 기다렸으나 기광은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굳이 보채서 듣고 싶은 마음은 없어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근데 왜 불러도 못 들어.”
“…나 하나도 안 들려.”
“안 들린다고?”
번거롭게 됐다. 훈련을 하다 위험상황이 닥치면 불러 제 옆에 둬야 뭘 시키든 가이딩을 해주든지 할 텐데. 하나도 안 들려. 예전엔 안 그랬는데, 여기 오면서부터 그래. 그렇게 말하는 걸 그대로 받아 적은 준형이 심각한 표정에 빠졌다. 보통의 센티넬은 감각이 증폭되어 괴로움을 겪는다. 하나의 감각이 멎는 건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근데 준형아.”
차트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준형을 바라보던 기광이 결심한 듯 저를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왜.”
“너 그… 혀 좀 안 하면 안 돼?”
“……뭐?”
“아니 가이딩할 때… 혀가 너무 깊게 들어와서 좀 그래.”
아마 감각이 돌아오는 와중에 일어나는 느낌이라, 더 생경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준형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아씨 좀. 좀 그래.”
영 가이딩에 어색한 기광은 자꾸 어색한 듯 굴었다. 준형의 가이딩을 스킨십으로 받아들이니 어색해하는 건 당연했다. 준형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그대로 뒀다는 게 정확하다. 준형 역시 가이딩을 가이딩으로, 받아들일 수만은 없었거든.
-
소파에 얌전히 앉아 검사 결과를 기다리던 기광이 대뜸 말문을 연다.
“나 존나 세다며.”
“그랬지.”
기광이 그 언젠가의 제 말투를 따라 하며 발을 쭈욱 뻗었다. 기광의 능력은 가히 대단했다. 센터 내 발굴된, 훈련되고 있는 모든 센티넬과 견주어도 월등할 만큼. 실없는 말투로 말하긴 했다만 영 거짓말도 아닌 이야기였다.
“근데 왜 쪽팔리게 네 앞에서 픽픽 쓰러지지?”
“원래 그런 거야.”
부루퉁한 표정이 됐다. 보통 가이드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가이딩이 되므로 센티넬이 쓰러지는 일은 자주 없었다. 조절이 미숙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준형이 봐주기는 하지만, 몸에서 흡수하는 충격까지 준형이 통제할 수는 없었으므로 기광은 다른 이들보다 쓰러지는 일이 빈번했다. 필시 다른 센티넬들에게 쿠사리를 먹었거나, 연구원들에게 바람이 든 게 분명했다.
“너 수석연구원이라며.”
“어.”
“S급 가이드라며?”
“어.”
“그럼 나 안 쓰러지게 해줘.”
대뜸 요구하는 말이 엉뚱하기 짝이 없다. 그 까만 눈망울을 바라보던 준형이 홱, 고개를 돌렸다.
“…싫어.”
“싫다구?”
“어. 내가 왜?”
“왜라니?!”
기광은 꽤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했다. 피식거리는 준형이 얄밉다는 듯이 제 옆에 붙어 앉으며 그의 어깨를 흔든다. 기광이 흔드는 대로 몸이 흔들리며 준형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지만, 짓궂은 마음이 들어 사실대로 고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폭주하면 너 이겨.”
“당연하지. 지금도 말 잘못하면 나 통닭구이 되는 거 한순간인데.”
“그럼 나한테 잘해야지?”
“아 잘해야 돼요?”
“당연한 거 아니에요?”
이씨. 팔이 흔들리는 와중, 제게로 가까이 다가온 찰나에 그의 어깨를 잡은 준형이 그윽한 눈빛을 만들었다.
“왜, 왜 그렇게 쳐다봐?”
“가이딩 해줄까?”
“지금 필요 없는데?”
“필요할 수도 있어. 잘 생각해봐.”
기광이 물러나지 못하도록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준 준형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기다란 목선에 입술을 누르며 알 수 없는 기분에 빠졌다. 그러니까, 살면서 다시는 느껴볼 수 없을 것만 같은 감정. 뭔가 덫에 걸려도 단단히 걸린 것만 같은 기분 말이다.
-
매일같이 밤늦게 취침을 하곤 해가 머리 위로 올라왔을 때쯤에야 미적거리며 기상하던 준형의 생활리듬이 돌연 바뀌었다. 아침마다 실시하는 검사 기록을 확인하고 훈련장에 나타나 그의 모든 훈련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런 준형을 두고 혁수는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 퉁명스레 물었다. 여태까지의 노고가 물거품이 된 것이 매우 불만스럽다는 듯.
기광이 고개를 숙임과 동시에 화염이 타올랐다. 그의 주위로 둥그런 반원 모양과 함께 불길이 이동했다. 기광의 팔뚝, 허벅지에 부착된 기계가 붉은빛을 쏘아냈다. 자극받은 몸이 더 많은 불길을 뿜어냈다가 사그라든다. 기광은 불길을 컨트롤하는 능력에 꽤나 많은 시간을 소요하고 있었다.
“기광아.”
“……”
처음에는 준형이 틈날 때마다 가이딩을 해주지 않으면, 불길의 세기조차 조절이 어려웠다. 겨우 익숙해졌을 때쯤부터 센터는 조급해졌다. 조절만 된다면 가히 완벽하다 할 수 있는 기광의 능력을 더욱더 개발하려는 참이었다. 기광의 폭주에 준형이 버티고 있었으니 욕심내는 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서서히 고개를 든 기광의 눈동자가…
“그만해요.”
“예? 아니,”
“멈추세요.”
그가 인상을 찌푸리고 쳐다보는 통에 결국 자동제어장치를 해제한 연구원이 슬그머니 준형의 눈치를 보았다. 거의 풀리기 직전의 눈동자가 애써 준형을 주시하고 있다. 몽롱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달랐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최대한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다. 팔짱을 낀 채 기광을 주시하던 준형이 그에게로 다가섰다. 기광을 에워싼 불꽃이 서서히 죽는다. 준형은 얼른 기광의 앞에 다가서며 제게 힘없이 쓰러지는 기광을 받아들었다.
“오늘 여기까지 할게요.”
“저, 아직 남았는…”
“여기까지.”
준형이 싸늘하게 연구원을 돌아보았다.
“한다고.”
그의 눈빛이 희번덕였다. 기광의 훈련에 있어 전권은 준형에게 있었다. 그를 전담하는 대신 얻어낸 것이었다. 기광이 회복되는 순간 굴려질 행태가 뻔했기에 우선적으로 받아뒀으나, 어디까지 하는지 지켜보자 싶어 딱히 왈가왈부하지 않던 참이었다. 늘 훈련장에 도착해 가이딩만을 행하는 준형에 잠시 망각하고 있었는지 연구원의 눈빛이 순간 얼어붙었다.
“훈련이 애들 장난입니까. 같은 말 계속 반복하게 하지 마세요.”
싸늘하게 뇌까린 준형이 기광을 비치된 들것에 눕히곤 걸어 나갔다. 넓디넓은 훈련장에 준형의 구두가 또각이는 소리만 울릴 뿐이었다.
-
무슨 소문을 듣고 온 건지 오랜만에 등장한 혁수는 느물느물 웃었다. 사실 준형이 기광을 맡은 이래로 수혁이 해야 할 역할은 십분 줄어 도통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다. 기광이 도착하기 전, 용케 시간을 맞춰 온 수혁이 그의 앞을 서성였다.
“어때요?”
“뭐.”
“또 모르는 척하신다.”
“뭐 임마.”
지야말로 어제 기광의 데이터 열람 흔적이 남은 줄도 모르고 웃는다.
“330이랑요.”
“그게 누구야. 기광이?”
“오오 그 정도 사이예요?”
“헛소리 할 거면 가라.”
선배 요즘 간부들한테 자주 얘기 나오는 건 알아요?
준형이 무감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뭐. 어차피 모르고 벌인 짓은 아니다. 이미 기광이 아니면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니, 기광이건 준형이건 능력을 써먹지 못한 늙은이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건 뻔했다. 그러나 준형은 쉽사리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그럴 맘도 없었다.
서류를 뒤적이던 준형이 짐짓 미간을 찌푸렸다. 기광이 아침에 일어나서 훈련장을 가지 않고 준형의 연구실을 먼저 들리는 건 일상이 되었다. 소파에 앉아 노닥거리던 기광의 주의를 끈 준형이 고개를 갸우뚱, 숙였다.
“야 어떡하냐.”
“왜?”
“너 수치가 많이 높네.”
“무슨 수치?”
“호르몬이 폭발하면 너 각성 상태가 되는데, 검사해보니까 기본 축적량이 높아.”
웃음기 섞인 말에도 영 눈치를 못 챈다. 눈에서 제법 겁을 집어먹었다. 평소에도 준형이 붙어 관리를 해준다면 지난번 같은 초유의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테지만 아무래도 주변인들의 모든 신경을 받고 있는 터라 부담이 된 모양이었다. 그렇잖아도 큰 눈이 함지박처럼 커져서는 눈을 깜빡였다. 그, 그럼 뭐 해야 되는데?
“일루 와봐. 이런 건 평소에 가이딩으로 빼줘야 돼.”
겁을 잔뜩 집어먹은 기광이 제게 다가왔다. 준형이 의자를 앞으로 굴리며 두 다리를 벌렸다. 한쪽 허벅지를 탁탁 쳐봤더니, 잠시 머뭇거린다.
“꼭 이런 자세로…”
“빨리빨리.”
보채는 음성에 제 허벅지에 앉는다. 준형은 기꺼이 입술을 벌려 기광의 도톰한 입술을 머금었다. 연구실에 침대가 괜히 있는 건 또 아니거든.
-
준형의 연구실은 뭐랄까, 쉬이 빠져나갈 수 없는 지옥의 덫 같은 공간이랄까. 물론 준형 한정이긴 했다. 요즘 또 매일같이 부지런을 떨었더니 쉬어주고 싶네. 이제 훈련하러 가야 한다며 부산을 떠는 기광을 끈 준형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혁수가 예의주시하고 있는 걸 알고 있다. 혁수의 뒤에는 간부들이 있다. …뭐 어쩌라고 싶다.
“훈련 가야 되는데.”
“괜찮아.”
살살 달랜다. 기광은 상부의 명령에 매우 잘 따르는 전형적인 모범생 타입이라 꾀는 재미가 있었다. 제 앞으로 다가오는 준형의 어깨너머 시계를 흘끗 바라보는 기광의 눈빛이 느껴졌다. 아 글쎄, 괜찮대두. 준형이 킬킬 웃었다. 훈련 그까짓 거 빼먹는다고 뭐 불지를 거야 뭐야. 불 지르기는 네 전문이니까 괜찮아.
기광을 벽으로 몰아세운 준형이 고개를 틀어 살짝 허리를 숙인다. 키스하자. 아니면 너 큰일나아. 장난처럼 속삭이자 기광도 별 수 없는지 피식 웃었다. 분위기야 잡힐 만큼 잡혔고 서서히 고개가 가까워졌다. 그리고,
쾅ㅡ!
“선배 거기 있는 거 다 알아요!!”
이 개새끼….
그대로 돌진하려다 힘이 쭉 빠진 준형이 이를 아득 갈았다. 헐, 어떡해? 문 열어야 되는 거 아니야? 준형이 진작부터 손을 써 잠가놓은 손잡이를 쥔 기광이 고개를 저으며 묻는다. 눈치도 없고 도움도 안 되는 집착남 새끼. 준형이 욕을 씹으며 기광의 손을 거둔다. 그리고 아직도 쾅쾅대는 혁수에게 문 사이로 대답하듯 쾅ㅡ! 발로 문짝을 깠다.
“야!”
“뭐요!”
“존나 바쁘니까 이따가 다시 와.”
그리고 입술을 맞댔다. 제 품의 기광이 웃는 듯, 작게 어깨를 들썩이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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