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Girl
- 2018년 9월 9일
- 2분 분량
[요섭/기광] 서큐버스
W.설령
이기광이 내 하룻밤을 훔친 그날을 기억한다. 그가 내게 속삭이던 사랑한다는 빈말을, 나는 여전히 기억한다.
골목 사이에 위치한 클럽. 겉보기에는 평범한 클럽인 척하고 있지만, 알고 보면 게이들이 득실거리는 클럽이라 했다. 본디 동성(아니, 어쩌면 사람 자체)에게 관심이 없던 나는 발걸음 한 번 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날 나는 윤두준을 따라 그 클럽에 갔다. 별 이유 없었다. 술을 마시고자 윤두준을 만났고, 윤두준이 하도 가자 졸라대길래 갔다.
"그래, 예쁜 놈 만나면 즐기기도 하고. 어? 좋잖아."
장난스럽게 말하는 윤두준을 흘겨 보며 클럽 아래로 향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관심 없었다. 목적은 술이었지 예쁜 놈이 아니었다. 분명 그랬다.
윤두준 개새끼. 윤두준 그놈은, 나를 버려둔 채 사라졌다. 아마도 (유일하게) 잘난 얼굴로 남자나 꼬시고 있을 것이 뻔했다. 이럴 거면 나를 왜 데리고 온 건지 알 길이 없었다. 나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앞에 놓은 술을 마셨다. 씁쓸한 액체가, 목뒤로 넘어가는 느낌이 알싸했다. 그리 몇 잔 비우자 취기가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반쯤 남은 술잔을 비워내고, 청포도 하나를 입에 넣었다. 알싸함과 달달함이 섞였다.
정신 사나운 전등, 시끄러운 분위기, 이곳저곳 작업이나 걸고 다니는 사람들. 소란스러웠다. 나는 소란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조용한 곳을 선호하는 편이었으니 이런 분위기가 마음에 들 리 없었다. 억지로 끌고 온 윤두준도 없는 마당에 내가 이곳에 더 머물 이유는 없었다. 목적은 술이었으니, 마지막 잔을 비우면 나가려고 했다. 마지막 잔을 비웠을 때,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기 전까지는.
"마지막 잔이에요? 다음 잔은 나랑 어때요?"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미성 섞인,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다. 흰 피부에, 짙게 그린 아이라인이, 높은 콧날이, 두툼하고 붉은 입술이 매혹적이었다. 술기운이 올라서인지, 눈웃음 짓는 저 눈매가 야릇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여전히 야릇한 웃음을 흘리며 내 옆에 앉았다.
"나는 와인 좋아하는데. 그쪽은 요? 아, 벌써 취했나?"
아, 벌써 취했나.라며 키득 웃는 그의 웃음이 미더웠다. 마치 '술 진짜 못 하는구나.'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 탓이었다. 나는 대답 없이 와인을 주문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빤 바라보는 눈이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흥미로운 목표물을 본 듯 반짝이는 그 눈망울이.
"나는 이기광이에요. 그쪽은?"
"양요섭."
이름 예쁘네요. 하며 눈이 휘어지게 웃으며 내 허벅지에 손을 얹는 이기광을 흘겨보았다. 술집 여자 같다고 느껴질 행동임에도 천박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당돌하고,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예쁜 놈 만나면 즐기기도 하고. 장난스러운 윤두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몇 잔의 술이 오갔다. 이기광, 그리고 붉은 와인은 어울리는 구석이 있었다. 퇴폐적이면서도 매혹적인 분위기가 어울렸다. 붉은빛의 액체를 넘기는 그의 입술을 빤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이기광은 나를 향해 웃었다. 두툼한 입술 사이로 옅은 포도향이 났다.
"요섭 씨, 여기 처음이구나."
"..."
이기광은 여전히 헤실 거리며 나를 바라봤다. 아이라인 짙은 눈매가 휘어졌다. 그러다 이내, 두툼한 입술을 내 입술에 포개었다. 이기광은 야릇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우리, 2차 갈까요?
그날 밤을 선명히 기억한다. 알코올의 알싸한 향과 옅은 포도향, 달띤 숨이 섞여 달아올랐던 밤. 고요한 방 속에 퍼졌던 샛된 울음소리를. 사랑해요, 쉽게 속삭였던 그 미성을.
「어제가 마지막 kiss 널 잡지 못한 내 miss』
그 후로 이기광을 만난 적은 없다. 그와 보낸 다음 날 아침, 나는 이기광을 집에 데려다주었으나 번호를 묻지는 않았다. 그가 내려달라고 한 곳이 그의 집인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흔하디흔한 하룻밤의 인연,이라고 생각한 탓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을 틀렸다. 이기광은 단순한 하룻밤의 인연이었으나, '흔하디흔한' 하룻밤의 인연은 아니었다. 그는 깊은 밤, 내 꿈에 찾아온 서큐버스 같았다. 지독하게도 매력적이고 매혹적인. 거부할 수 없게 만들고, 하룻밤을 삼켜 버리는 서큐버스. 그 모습조차 매혹적이라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서큐버스. 나는 아직까지도 이기광을 잊지 못했다.
누군가와 하룻밤을 보낸 날이면, 이기광이 떠올랐다. 그 야릇한 눈매가, 두툼한 붉은 입술이. 두툼한 입술을 맞춰오는 감촉과 그 사이에서 흘러나온 사랑한다는 말을.
나는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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