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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utiful

  • 2018년 9월 9일
  • 12분 분량





축구공을 따르던 시선에 따라 발이 바쁘게 움직였다. 아무리 고교축구라고 해도, 저건 누가 봐도 진짜 사람 죽어나는 패스였다. 숨이 헉헉거리면서 뛰어야, 겨우 축구공을 제발 앞에 놓였다. 정말 누구와 비교되는 패스다. 결국 삐쭉거리는 입으로 두준은 제 앞에 놔두어진 공을 몰고 골대를 향해서 미친 듯이 뛰었다. 눈대중으로 각도를 잡고, 골키퍼와 한번 눈싸움을 한 후에, 공을 골대로 스윽 밀어 넣는다는 느낌으로 발목 스냅을 사용해서 골을 넣자, 환호의 소리가 났다. 팔을 벌리고서 축구장을 누비면서, 벤치 쪽을 힐끔 보았는데, 텅 비어있다. 없다. 아...진짜 축구할 맛 안 난다.


두준이 축구를 계속하게 된 건 아주 단순한 이유였다. 골을 넣고 나면, 축구장 어디에서인지는 몰라도, 저에게로 달려와서, 곱게 접힌 눈으로 안기는 그를 안았을 때의 그 기분이 좋아서였다. 골을 넣었을 때의 기쁨보다 그를 안아 들었을 때의 기쁨이 더 커서, 얼마나 미친 듯이 골대를 향해 달렸는지는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 감독은 그런 두준의 속내도 모른 체, 날로 성장하는 자신의 제자의 실력에 국가 선수를 2명이나 보겠다며 좋아하셨다. 감독님의 기대에 보답하려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둘은 함께 같이 국가대표 마크를 다는 것을 꿈꾸며 연습을 했고, 게임에 임했다. 어린 나이라고 했지만, 둘은 프로 리그의 게임까지 찾아보면서 또래답지 않게 진지하게 꿈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 비가 오는 날이었다. 꿈자리가 뒤숭숭했던 두준은 그날 컨디션이 영 좋지 않았다. 중학교 리그 결승전이라 거세게 오는 비에도 게임은 지연되지 않았다. 결승전이라는 타이틀답게 두 학교 모두 다 팽팽하게 게임은 흘러갔고, 점수조차 터지지도 않는 그런 치열한 게임이었다. 2학년이었지만, 체력 저하인 선배 선수를 대신해서 후반에 들어온 두준은 후반 15분을 남겨두고, 분명히 공이 제 발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골대를 향해서 냅다 뛰었다. 골이 터졌고, 고질적으로 약했던 수비라인 때문에 전반 후반 다 뛴 그 하얀 얼굴을 필드에서 찾았다. 분명히 저에게로 뛰어와서 안겨야 하는 데, 없다.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저쪽에 사람들이 모여있다. 무슨 일인지 몰라서, 얼굴을 슬쩍 바라보자, 팀에 누군가가 쓰러져있다. 경기는 잠시 멈췄고, 슬슬 뛰어서 그곳을 가자, 거긴 필드에 누워서 무릎을 감싼 기광이 있었다.


결국 응급차가 왔고, 경기는 이어졌다. 꿈자리마냥 게임은 뒤숭숭하긴 했지만, 경기에 우승했고, 우승컵을 들고는 있었지만, 이미 마음은 병원으로 가는 응급차에 함께 있었다. 결국 뒤풀이를 하러 가자는 감독님께 사과를 하고서, 부모님과 함께 병원을 가자고 졸랐다. 비를 흠뻑 맞아서, 적어도 씻고는 가자는 엄마의 성화에 집에서 급히 씻고, 아버지의 차를 타고, 병원으로 갔다. 우승을 했지만, 쌔한 느낌을 가지고 병원에 도착했을 땐, 이미 기광은 수술실에 들어가 있었다. 십자인대 파열이었다.


부상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고, 언제나 부상을 걱정하시던 녀석의 부모님은 이번 계기로 정말 뜯어말렸다. 은근 엄마에게 약한 녀석은 결국 엄마의 눈물에 넘어가서, 깔끔하게 축구를 포기하고, 공부에 집중하기로 했다. 결국 둘의 꿈은 두준의 것으로 온전히 남아서, 지금 축구 명문고라고 일커름 받는 이곳에서 죽어라 땡볕에서 연습하는 제 모습에 한숨을 쉬면서, 건물 쪽을 바라보았다.

그래, 난 지금 우리의 꿈을 이루려고 너의 몫까지 뛰는 거야.




Beautiful

W.동면백곰



기광은 입술을 꾸욱 물고선, 머리에서 쥐가 나도록 문제와 씨름했다. 주말에 두준과 프리미엄리그의 경기를 밤새도록 본다고, 못한 문제까지 다 봐야 하니,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점심시간에 있는 두준의 연습도 못 봤지만, 지금의 속도로는 내일 경기도 못 볼 거 같았다. 이러면 안 돼하고 혼잣말을 속삭이고선, 다시 문제지를 뚫어져라 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요섭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제 문제집에 집중했다.



기광이 저렇게 집중해서 풀고 있는 거면, 제가 원하는 것보다 진도가 늦거나 아님, 내일 못한다는 뜻인데... 이번엔 둘 다 일수도 있다는 생각에 주머니 속에 꿍쳐둔 소시지 하나를 꺼내서 책상에 올려주었다. 그것을 본 기광이 고개를 제 쪽으로 돌려서 해시시 하게 웃는다. 그게 예뻐서, 요섭은 웃으면서 손을 뻗어서 기광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몇 번 닿지도 않았는데, 찰싹하면서 제 손을 누군가가 내려쳤다. 짜증 나는 얼굴로 기광 뒤쪽에 서있는 검은 물체를 보자, 언제 왔는 지도 알 수 없는 두준이 무서운 얼굴로 저를 내려다본다. 저 개시끼. 그림자가 든 제 머리 위를 본 기광은 환하게 웃으면서 두준을 바라본다. 두준은 기광의 책상에 제 오른손을 기대고 서선, 다른 팔로는 기광의 어깨를 감쌌다.



"밥 먹었어?"



다정하게 짝이 없는 목소리에 기광은 고개를 흔들었다. 대답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리고 요섭을 째려보려는 찰나, 너 기다렸어. 하고 기광이 대답을 했다. 그제서야 기분이 좋아진 두준은 웃으면서 밥 먹으러 가자고 말을 했다. 기광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보고 있던 노트를 곱게 덮으면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두준은 그런 기광 옆에 바싹 서선 종알종알 떠든다. 하여튼 등치 값 못한다. 고개를 어느 정도 흔들거리던 요섭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둘 뒤를 따라갔다.


요섭은 저와 동갑내기 사촌인 기광에게 언제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 같이 축구를 하자고 조른 것도 저였고, 기광이 너무 축구에 빠지자, 삐져서 팀을 나간 것도 저였고, 십자인대가 파열한 그 상대팀의 학생이 저와 같은 반 학생이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아주 이성적인 판단하에, 요섭에겐 잘못이 없었다.


요섭의 권유에 축구를 하겠다고 한 것도 기광이었고, 두준을 만나서 방긋 웃은 것도 기광이었고, 요섭만 쏙 빼놓고, 두준과 축구에 미쳐서 공부도 안 하고 뽈만 따라다닌 것도 기광이었고, 십자인대가 파열될 때까지 뛴 것도 결국은 기광이었다. 하지만 요섭의 입장에선 이성적인 판단을 얄팍한 변명이라고 치부하는 데는 아주 인상적인 사건이 있어서 그랬다.


바쁘다는 핑계로 기광의 병문안을 가는 게 한참 걸렸다. 결국 엄마에게 등을 두어 번 맞고서, 퇴원을 한 기광의 집으로 갔다. 익숙하게 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아파트 문을 열고 왼쪽에 자리한 기광의 방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순간, 울음소리가 들렸다.


살짝 열린 문 사이로, 이모의 품에 안겨, 다친 무릎을 쥐고, 엉엉 울던 기광의 모습에 요섭은 충격을 받았다. 축구가 너무 하고 싶다고 우는 기광의 모습에, 요섭은 이제까지 했던 모든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서 기광이 다쳤다고 생각했고, 그저 기광을 도와줘야겠다고 생각뿐이 없었다. 그래서 공부를 선택한 기광에게 어떻게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서, 같은 고등학교를 신청했고, 같은 반을 넣어달라고 담임선생님께 조르기까지 했다.


축구를 포기한 기광은 앞도 뒤도 보지 않고, 의대를 목표로 공부했다. 처음에는 그냥 이모부의 직업을 따라가려나 했다. 원래 머리가 좋았고, 축구를 포기하고 앞만 보고 달리는 기광의 성격상, 공부를 시작하니, 순간 가파르게 올라가더니, 중학교 졸업 때는 손가락 안에 드는 등수를 찍는 기함을 발휘했고, 일반고를 선택해서 오히려 선생님들이 더 말릴 지경이었다.


같은 고등학교에 와서, 바로 옆에서 기광을 돕는다는 이유로 같이 공부하면서, 기광이 의대를 가겠다고 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를 알아내는 데 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기광이 처음 국가대표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부터, 그리고 축구를 포기하고 의사가 되겠다고 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저 기광의 옆에서 식판에 얼굴을 파묻고 석식을 먹는, 저 괴물, 윤두준이란 사실은 아마 기광과 두준 빼고는 다 아는 사실일 거라고 생각했다. 둘 다 눈치는 없어가지고... 국에 든 불어터진 만두를 한입에 넣은 요섭이 우그적우그적 씹자, 맞은편 앉은 기광이 귀여워하면서 방긋 웃는다.


니가 더 귀여워 이 시끼야.


그래서 저의 죄책감이 더 커지면 커질수록 두준을 욕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기광은 아니야 하고 눈을 방긋 접으면서 말했다. 뭔가 그냥 벽에 대고 제 머리를 박는 기분이었다. 결국 정면돌파하기로 했다. 나 윤두준이랑 너랑 있는 거 싫어. 유치원생도 안 하는 거지만, 이렇게라도 부딪혀보자는 게 요섭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제가 생각했던 시나리오가 아닌, 그 예쁜 기광의 눈에서 물이 퐁퐁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정말 당황한 요섭이 결국 백기를 들고 곁에서 그저 둘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결과, 요섭은 기광의 꿈을 인정해주고 멀리서나마 둘을 응원하기로 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두준의 눈빛이었다. 정말로 달디단 눈으로 기광의 모든 행동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다정한 말투와 달달한 눈빛에 배려 넘치는 행동에 요섭은 두준이 그저 상냥하고 다정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기광에게만 제한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준은 축구장은 물론이고 수업에서도 두준은 소문난 짐승이었다. 눈빛 하며, 투박한 말투며, 특히 플레이를 할 땐 강하고 빨리 밀어붙이는 성향이 있었다. 거칠고 사납다고 밖에 표현되지 않았다. 거기다가 운동장에서 그의 입은 걸걸한 수준을 넘어서 국밥집 욕쟁이 할머니를 뺨쳤다. 그런 두준이 유일하게 다정하고 예뻐하는 사람은 기광이었고, 그건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되고 있다는 걸 알기에 요섭은 고개를 끄덕이며 밥을 한 스푼 크게 떠먹었다.



"왜이러케 밥을 몬머거? 속 안 조아?"



입속 가득 밥을 집어넣고 완전 다람쥐같이 생긴 기광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묻는다. 그런 기광이 기특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고개를 저으려는 데, 두준이 기광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의 관심을 가져가버렸다. 하여튼 기광이 조금만 관심을 다른 데로 옮기는 걸 못 보는 놈이다.



"기광아 저시끼 나두고 우리 아이스크림 먹어러가자"



진짜 저시끼. 진짜 좋아하려고 해도 재수 없다.




***




석식을 먹고, 학원을 간 요섭 대신, 앞 반에 있어야 할 두준이 그 자리에 앉았다. 에어컨 없이 선풍기만 윙윙 돌아가는 교실에 몇 명이 야자를 한다고 남았는데, 시곗바늘이 10을 향해가는 순간에, 달랑 둘만 남아있었다. 책을 책상에 올리고, 글자를 몇 개 읽다가, 머리를 그대로 책 사이에 넣고 기광을 올려다보았다. 10년 전 요섭의 손을 잡고 축구를 보러 왔던 그 순간부터 같이 축구를 하고, 꿈을 키우던 그때도, 그리고 비록 다른 꿈을 꾸곤 있지만, 응원하는 지금까지도 모두 기광이 너무 좋았다. 그렇게 주욱 자신과 기광의 세월을 생각하던 두준의 시선에 책을 보던 기광은 제 옆에 앉은 두준을 보고서 살짝 웃었다. 그리곤 다시 책에 집중했다.



"나 너 좋아해."



두서 없이 말하는 두준의 목소리에 기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세어 나온 말에 두준도 흠칫 놀란 듯했다. 정말로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튀어나왔다. 근데 그 말이 너무나도 진실되게 느껴져서 농담이라고 번복할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두준은 책상에서 제 머리를 떼고서, 기광과 마주했다. 다른 때보다 훨씬 진지한 두준의 얼굴은 마치 5:1로 지고 있는 경기에 투입된 축구선수의 것과 같았다. 이대로 그냥 웃으면서 넘어간다면 저는 죽을 때까지 기광에게 고백하지 못하리라고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냥 네가 좋아. 축구를 할 때부터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


두준의 담담한 목소리가 교실을 울리기 시작하자, 어쩔 줄 모르는 기광은 달아오르는 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달달하게 짝이 없는 고백에, 기광이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두준에게 전달해야 할지 몰랐다. 물론 그걸 모르는 두준은 기광이 얼굴을 두 손에 감싸는 걸 보고, 아 망했다는 비참하리라만큼 억울하고 슬픈 감정에 울컥하고 눈물이 났다. 10년을 넘게 가졌던 감정을 퍼 붙고 나니, 남는 건 공허함뿐이었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난 두준은 코끝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교실 밖을 나가려고 문쪽으로 향했다. 텅 비어진 두준의 자리에 기광은 정신을 차렸고, 저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빠르게 두준이 나간 문으로 뛰어나갔다.


교실문을 나와, 복도를 걷는 두준은 팔을 들어서 눈을 닦았다. 그 뒷모습을 본 기광은 뭔가 오해한 것 같은 것을 느꼈고, 빠르게 뛰어서 두준을 잡으려고 뛰었다. 뒤에서 느껴지는 느낌에 두준은 냅다 뛰기 시작했다. 거의 반사적인 동물적 감각으로 뛰는 두준과 그 뒤를 따르는 기광의 속도가 현역 시절을 뺨쳤다. 그리고 급하게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중에, 기광이 갑자기 소리를 내면서,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기광의 목소리에 놀란 두준은 아래층에서 뒤를 돌아서 기광을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주저앉아 버린 기광이 제 무릎을 쥐고 있어다가 균형을 잃고 기광의 몸이 앞으로 쓰러졌다. 놀란 두준이 빠르게 기광의 허리를 잡고선 계단에서 몇 번 굴렀다. 계단 가장 아래 떨어진 두준은 번뜩 눈을 뜨고 제 밑에 있는 기광을 바라보았다. 바닥에 떨어진 기광은 어디가 아픈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다.



"괜찮아? 다친데 없어?"

"두준아!"

"왜 어디 아파? 무릎이야?"



놀란 얼굴에 일어나려는 두준의 목에 기광의 팔이 감겼다. 놀란 두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런 두준을 보고 배시시 웃는 기광은 그를 꼭 안았다. 마치 제 품에서 날아가 버린 꿈보다 더 놓칠 수 없는 더 좋은 사람.



"나도 너가 너무 좋아."





번외




"너 소개팅 안 나갈래?"

"네 안 나가요. "


선배 선수의 질문에 두준은 정색한 얼굴로 대답을 했다. 훈훈한 얼굴에 뛰어난 실력. 탁월한 골 결정력이나 리더십 거기다가 매너까지 있는 두준은 여기저기서 러브콜을 받는 입장이었다.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꽤나 좋은 성적을 내었으니, 군대는 면제, 초마다 뛰는 몸값은 이제 억 단위를 넘어섰다. 그러다 보니, 연예인들은 물론이고, 여기저기서 두준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팬카페는 양호했다. 협회로 오는 팬 레터도 양반 수준이었다. 어떻게 귀신같이 전화번호를 알아내서 문자가 오는 경우도 다량 있었다. 하지만, 매번 두준은 미모의 의대생을 만난다고 말하면서 거절했다.



I Like You The Best

(Beautiful 외전)

-동면백곰


막 레지던트 4년 차가 된 기광은 프리미엄리그를 뛰는 두준보다 바빴다. 그러다 가끔 얼굴을 본다 하면, 기광의 뺨은 전보다 더 말라 있었고, 허리를 움켜안을 때면, 갈비뼈라도 부러질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리그에서 바로 J리그로 옮겨간 그는 꽤나 좋은 성적 내었다. 그러던 중, 기광이 본과를 졸업할 때쯤, 두준은 그렇게 꿈꾸던 프리미엄리그로 자리를 옮겼다. 혹여나, 몸이 멀어지니 마음도 멀어질까 했던 걱정이 우스울 정도로 기광과의 시간은 더 애틋해져만 갔다.


그렇게 프리미엄에서 4년을 보내고 나니, 기광과의 연애도 벌써 10년이 되었다. 이렇게 연애가 길어지자, 두준의 부모님은 이제 그냥 결혼해서 함께 해외로 나가라는 은근히 압박을 주셨지만, 막상 기광을 보면, 우리 예쁜 기광이 하시면서, 두준이 신경 쓰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해라고 할 정도셨다. 그러다 보니, 애가 타는 건 언제나 두준의 입장이었다.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자, 아직 이사가 덜 끝난 집 마냥 텅 비어있다. 겨우 돌아가는 공기 청정기가 있긴 하지만, 답답한 느낌에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켰다. 냉장고를 열어보자, 물만 잔뜩 있다. 기광이 한참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증명되자, 그냥 이번엔 영국으로 납치를 감행할까 하고 고민해보았다.


매번 한국으로 올 때, 병원을 관두게 하고 영국에 같이 가서, 내조를 해달라고 조르고 싶을 정도였다. 아니 내조 안 해도 괜찮고, 그냥 제 곁에서 숨만 쉬고 있으면 된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기광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장난으로라도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고, 그저 다가오는 익숙한 헤어짐에 아쉬워하는 게 전부였다.


결국 한숨을 짧게 내쉬고서, 집을 정리했다. 뭐 사실대로 말해서 정리할 거리가 없었다. 로봇청소기는 처음 이곳으로 이사 왔을 때, 사주고, 셋업까지 해주었다. 하루에 한 번씩 시간이 되면 돌돌거리면서 돌아갈 것이다. 음식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 부엌에 들고 들어왔던 쇼핑백에서 이것저것을 꺼냈다. 우선 김치 봉지를 뜯어서, 기광이 좋아하는 김치찌개를 끓였다. 고기를 달달 볶다가 썰어놓은 김치와 양파를 쑥 넣은 다음에 육수를 넣으면 좋지만 가볍게 패스하고, 물을 넣었다. 설탕을 살짝 뿌리고, 파를 종종 썰어서 위에 올려두었다. 밥은 즉석밥으로 할 거니깐 괜찮고, 고기도 좀 구울까 하다가, 괜히 찬 걸 먹였다가 체할까 봐, 고기를 보다가 냉장고 안에 넣었다. 마트에서 산 반찬도 꺼내고 하니, 이제 집이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듯했다.


침실로 들어가자 담담했던 마음이 슬퍼지려고 했다. 덩그러니 있는 침대는 정리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협탁 옆에는 이 집으로 이사 올 때 유일하게 기광이 가지고 온 저와 기광이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 든 액자가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이어지는 화장실로 들어가자, 세탁 바구니에 수건이 쌓여있었다. 결국 세탁 바구니를 들고 와서 세탁기 안에 넣었다. 경쾌한 소리를 내면서, 세탁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집을 한번 둘러보고, 할 일이 없는 두준은 결국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켰다. 그리고 눈을 뜬 건, 세탁기에서 띠리랑 하는 소리와 함께였다. 언제 잠들었는진 모르지만, 확실히 잠에서 깬 두준이 머리를 긁적거리다 베란다로 나가서 세탁기에 있는 수건을 빼서 털곤 걸기 시작했다. 수건과 함께 나오는 기광의 드로즈까지 웃으면서 널고 나서 시계를 확인하자, 기광이 퇴근 시간이다.


두준은 빨리 모자를 쓰고, 차 키를 잡았다가 놓았다. 이곳으로 이사 온 이유는 병원과 가까워서였고, 정말로 도보로는 병원과 5분도 되지 않는 거리라서 차 키를 놓았다. 물론 피곤한 기광을 차를 타고 가서 데리러 올 수 있었지만, 퇴근시간이랑 겹쳐지면서, 차를 몰았다간 5분짜리 퇴근이 30분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가는 길에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서, 먹으면서 천천히 걸었다. 병원 앞에 있는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아서 기광에게 문자를 하려고 전화기를 꺼냈다. 그리기가 무섭게, 병원 밖으로 나오는 기광을 볼 수 있었다. 피곤한 듯, 안경을 끼고, 청바지에 하얀 티셔츠만 입은 기광의 모습에 대학교 때가 생각났다. 역시 여전히 예쁘고, 여전히 귀엽고, 여전히 이기광이었다. 여전히 팔불출 같은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려고 올리는데, 기광 뒤로 뛰어오는 남자 하나가 웃으면서, 기광에게 말을 건네었다. 기광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서 인사를 하지만, 왠지 불편해 보였다. 거기다가 손을 저으면서, 고개를 흔드는 기광의 팔목을 쓱 잡는다. 남자의 행동에 기분이 나빠진 두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광은 잡히지 않은 손으로 제 손목을 잡고선 놔달라고 하는 게 보였다. 뚜벅뚜벅 그쪽으로 걸어간 두준을 본 건 기광이 먼저였다. 그러자 기광이 곤란한 얼굴을 하면서, 손목을 툭 쳐냈다. 한 번 더 꾸뻑 인사를 하고 뒤를 돌아서서, 뛰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기광이 제 품 쪽으로 뛰어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기광의 어깨를 감싸며, 두준은 얼굴을 돌려서 그 남자를 한 번 더 쳐다보았다. 병원 계단에 어정쩡하게 선 그 남자가 기광과 두준을 보고선 뒤를 돌아서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기광을 혼자 놔두면 절대로 안 된다. 잔뜩 짜증 난 얼굴을 하고 있는데, 기광이 웃는다.



"뭐야?"

"아무것도 아니야. 언제 왔어?"

엄청 오래 기다렸어. 그러니깐, 상 줘."

"뭐야~ 정말 감동이잖아."



기광의 말에 두준은 멈칫했다. 그런 두준의 리액션에 놀란 기광이 왜? 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두준을 바라보았다.



엄청 무심했구나.."

"응?"

"아니... 이런 걸로 감동을 받는다니깐.. 내가 너한테 그렇게 못했나 싶어서.."


당황한 기광이 손을 흔들면서 아니라고 표현하지만, 이미 심각해진 두준은, 그래 K리그나, J리그에라도 이적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계약기간을 떠올리려고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혼자 두면 안 되었다. 이내 두준의 생각을 읽은 기광은 딴생각하지 마. 하고 말을 한다. 바스러지게 몸을 안아 보이자, 정말로 갈비뼈가 부서질 것 같았다. 말랐냐고 구박해봤자, 헤실헤실 웃고 넘어갈 놈이라서, 그냥 밥부터 먹여야겠다는 생각에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김치찌개를 올리고, 밥을 데웠다. 빠르고 익숙하게 고기를 구우려고 프라이팬을 꺼내자, 느릿느릿 씻으러 가겠다는 기광에게 빨리해야 해! 하고 말하자 고개를 끄덕인다.



고기를 굽고, 테이블을 세팅하는 데, 거의 다 식탁에 반찬들이 올라오자, 기광이 의자에 털썩하고 앉는다. 집에서 입는 편한 옷을 입고 나자, 고등학교 때 보았던 그 모습과 비슷해서, 두준이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보는 밥을 구경하는 기광은 신이 나선, 숟가락을 들고선, 김치찌개를 한 스푼 먹었다. 맛있어라고 말한 그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자, 그제서야 두준도 숟가락을 제 입에 가져갔다.



"두준아. 있잖아. 소개팅 같은 거 안 받아?"



밥을 반쯤 먹을 때 나온 기광의 질문에 엉? 하면서 놀란 얼굴로 기광을 바라보았다. 오늘 아침에 선배한테서 들었던 이야기가 있어서 좀 뜨끔할 뿐이다. 그러고 나서 고개를 흔들던 두준을 멍하게 바라보던 기광이 별 뜻 없이 그저 지나가는 말처럼 입을 뗐다.



"우리... 반지 할까?"



기광의 스치는 말에 눈이 번뜩 뜬 두준은 숟가락을 입에 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곤 옆에 있는 핸드폰을 켜서, 검색하고 있었다. 기광은 나름대로 표정관리를 한다고 나름 침착하게는 말했지만, 두근대는 심장에게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뱉었다. 벌써 두준과 알고 지낸지는 15년, 그중 사귄 기간은 벌써 10년쯤 되는 지금 이 시점에서 반지를 하자고 하는 건 웃기지만, 오늘과 같은 일이 반복되자, 기광은 은근히 두준에게도 이런 일이 있는 가하고 고민해보았다. 저야 하찮은 의사 나부랭이지만, 두준은 태극마크를 단 국가 선수에, 프리미엄리그에서도 꽤나 잘 나가는 선수이다. 그나마 부모님이 두 사람의 사정을 알아서 아무 말씀 없으시지만, 떨어져 있는 시간들이 많다 보니, 없던 생각들이 당연히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분명히 애인이 있다고는 했지만, 얼굴을 보여줄 수 없으니, 괜찮은 사람을 만나보라는 사람들의 말을 거절만 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사태는 심각해졌다. 멋대로 제가 오프인 날 약속을 잡고, 끌고 나가는 경우도 있었고, 직책을 이용해서, 보내기도 했다. 게이라는 걸 밝히고 나선 더욱 심해졌고, 오늘과 같은 사태가 나기도 했다.


계속 괜찮다고 거절을 했는데, 그 남자가 말도 없이 병원에 그냥 나타났다. 사진보다 훨씬 미인이라는 능글맞은 말까지 하는 남자에게 웃으면서 만나는 사람 있다 했다. 하지만, 남자는 차 한 잔만 마시자고 졸라대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자리에 당황하기도 하고, 두준이 기다릴 거라고 생각해서, 미리 약속이 있다고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마음에 든다고 말한 남자가 병원 밖까지 쫓아와선, 같이 차 한 잔만 마시자고 했다. 저녁 약속이면 좀 늦을 거 아니냐고 짜증 섞인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도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려던 생각은 두준을 보고 싹 사라졌다. 그가 제가 일하는 과의 수간호사님과는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두준이 훨씬 더 중요했다. 짧은 기간 머무는 두준과 오해의 소지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두준과 함께 얼굴 보고 있기만 해도 아까운 시간에 싸우거나 오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너무 자연스럽게 제 품에 넣는 두준의 모습이 너무 좋았다. 웃으면서, 퇴근하고 오는 길에 기광의 어깨에 머무는 두준의 손가락을 무심히 보던 기광은 샤워하는 내내 고민했었고, 반지라는 해답을 찾았던 것이다.



"난 수술할 때 뺐다 꼈다 하면 잃어버릴 거 같으니깐, 좀 심플한 걸로."



밥을 먹으면서 말을 하던 기광이 두준의 핸드폰을 보고서 살짝 멈추었다. 두준의 핸드폰에는 병원 밖에서도 보일 만큼 커다란 다이아가 박혀있는 반지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두준을 바라보자, 두준은 입술을 삐쭉거리면서, 심플한 밴드를 찾았다. 어떻게 된 게 10년이 지나도 그대로인 거 같았다. 결국 미소를 짓던 기광은 입을 떼면서 두준을 바라보았다.


맞추러 갈까?



생각지도 못한 빠른 전개에 두준은 살짝 놀랐지만,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좋아진 기광은 환하게 웃으면서 밥을 한 스푼 더 떠먹었다. 배부르다. 제가 치우겠다는 걸 굳이 말리는 두준을 도와서 식탁을 치우고, 남은 음식을 정리를 하였다. 요리를 해 준 감사의 표시로 설거지를 하는 기광 뒤로하고 거실 소파에 앉아서 계속 반지를 찾는 두준의 모습에 피식하고 웃어버렸다. 싱크까지 다 정리하고 나서, 기지개를 펴던 기광이 두준 옆에 앉아도 계속 반지를 고른다. 그런 두준이 귀여워서 웃으면서, 손을 뻗어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켰다. 때마침 나오는 프로가 휴가를 가는 프로그램이었다. 시원해 보이는 바다며, 출연진이 나와서 시내를 구경하고 즐기는 것이 보였다.


우와하고 살짝 리액션을 보이는 기광의 소리에 핸드폰만 바라보던 두준이 고개를 들어서 반짝거리는 기광의 시선 끝에 있는 텔레비전 속의 휴가지를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니, 기광의 휴가도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에 휴가 언제 나와?"

"응... 한 달 뒨가? 그때쯤?"

"그래? 그럼 그때 다시 오면 되나? 우리 이번엔 어디 갈까?"



두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광은 웃으면서, 제방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이 의아해서 그가 나올 때까지 침실 방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온 기광의 손에는 검은색 파우치가 들려있었다. 뭔가 싶어서 그 파우치를 바라보자, 두준에게 건네주었다. 뭐야 하고 기광을 올려다보니, 열어봐 하고 웃는다. 파우치를 열어보니, 웬 여권과 비행기 표가 있다. 비행기 표를 보니, 인천에서 영국행 비행기다. 기간을 보니 대략 한 달 정도. 그것도 정확히 비시즌 기간이다.



"나 신혼여행은 유럽 가고 싶은데.. 괜찮지?"




기광의 물음에 두준은 당황해하면서 머리를 긁적인다. 이런 식으로 받을 줄은 몰랐다. 기광은 두준의 반응에 싫어? 하고 되묻는다. 그러자 두준이 고개를 이리저리 흔든다. 그런 모습에 기광은 환하게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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