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bbon
- 2018년 9월 9일
- 4분 분량
“야! 그만 마셔!”
“양요섭, 너 집에 데려다줄 사람 없다. 어?”
친구들의 제지에도 요섭은 소주잔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결국엔 병째로 입에 털어 넣었다.
“미친 새끼!”
“아- 술이 왜 이렇게 다냐.”
요섭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쿵- 하고 테이블 위에 머리를 박았다. 진호와 성식은 짜증을 내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얘 진짜 헤어지고 제정신 아니네.”
“술 사준다고 해서 나온 우리가 등신이지. 이 새끼 집부터 보내고 2차 가자.”
“아니 두 달이면 이제 잊을 때도 됐지 않냐.”
“3년이 그렇게 쉽게 잊히냐. 하여튼 모쏠 아니랄까 봐.”
3년. 양요섭과 이기광이 사귄 기간만 3년이다. 그리고 양요섭과 이기광이 헤어진 지 오늘부로 딱 두 달. 양요섭은 아직 이별 중이다. 아니 미련 떠는 중인가.
고등학교 1학년, 요섭과 기광은 기타 동아리를 통해 친해졌다. 중학교 때부터 취미로 기타를 쳐왔던 요섭이기에 기타를 배우러 들어온 기광을 전담으로 가르쳐주었고, 기광은 그때부터 요섭을 좋아했다고 사귄 지 100일째 되던 날 말했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 방학, 기록적인 폭염, 짱가 노래방 8번 방. 10cm의 죽겠네를 부르던 요섭은 후렴구를 부르다 고개를 돌려 기광을 쳐다보곤 말했다. 우리 사귈래? 노래 반주 위에 참으로 무드 없고 뜬금없는 고백이 울렸다. 억누르고 있던 마음이 펑-하고 터져버렸고, 요섭은 고개를 푹 숙였다. 이렇게 고백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런 요섭을 가만히 쳐다보던 기광은 그래. 하고 무드 없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둘의 시작은 그랬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알릴 수 없는 비밀연애였지만 둘은 행복했다. 학교가 마치면 시내로 나가 맛있는 것을 사 먹고, 서로의 집에 놀러 가고, 같이 도서관에 가서 공부도 했다. 봄에는 요섭이 사는 아파트 단지에 예쁘게 핀 벚꽃나무 아래에서 사진을 찍었고, 여름에는 기광의 할머니 댁에 놀러 가서 물놀이를 했다. 가을에는 독서의 계절이라며 만화방에 가서 라면을 먹으며 만화를 봤고, 겨울에는 둘을 닮은 눈사람을 만들었다. 모든 계절에 서로가 존재했고 함께했다.
그런 둘 사이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건, 3주년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였다. 요섭은 대학에 입학하고 그동안의 학교와는 차원이 다른 캠퍼스 라이프를 즐겼다. 동아리도 들고, 매일 다른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다. 요섭이 20살을 즐기고 있을 때 기광은 아르바이트를 했다. 재정 사정으로 대학 진학을 포기한 기광은 재수를 준비하며 학비를 벌었다. 오전에는 독서실을 가서 인터넷 강의를 보며 공부를 했고, 야간에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었다. 그런 기광에게 요섭은 의지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이었다.
“요섭아 어디야?”
“어어, 나 술 먹고 있어! 내가 조금 있다 다시 전화할게”
시끌벅적한 소리 가운데 조금은 취기가 올라 보이는 목소리 몇 초에 바닥을 기던 기분이 치솟다가 다시금 뚝 떨어졌다. 끊긴 전화기를 붙들고 있는 자신이 초라했다. 서운함이 드는 자신이 싫었다. 그럼 새로운 친구들도 사귀어야지 당연하잖아, 20살이잖아. 기광은 자신만 제자리걸음을 하는 듯한, 아니 뒤처지는 듯한 상황에서 요섭을 이해하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요섭이 하루 종일 연락이 안 되어도, 자신이 말하는데 무성의하게 대답하며 친구와 카톡을 해도, 과제로 바쁘다며 약속을 취소해도 이해했다.
“학기 중에 내가 너무 소홀했지, 미안해.”
기광이 지쳐갈 때쯤 요섭은 방학을 했다. 방학을 했음에도 워크샵 준비와 동아리 MT 등등 여전히 바빴지만 그래도 학기 중보다는 기광과의 만남이 훨씬 많았다. 예전처럼 놀러도 가고, 심심한 데이트도 즐겼다. 치졸하지만 방학이 조금 더 길었으면 싶었다. 방학 중에 3주년을 맞았다. 펜션을 잡아서 케이크에 초도 불고, 와인도 마셨다. 정말 행복한데 기광은 자꾸만 불안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함이 무서워서 요섭에게 안겼다. 다정하고 너른 품에 안기니 불안은 종적을 감췄다.
“요섭아.“
”응?“
”요섭아.“
”응, 기광아.“
이리도 다정한 이름 한 번에 모든 불온전한 감정들이 사라지는데. 정말 이뿐이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유난히도 짧게 느껴졌던 두 달이 지나고, 요섭이 개강을 했다. 1학기 때보다는 연락이 잘 되었다. 물론, 방학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하루에 한 번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술 취한 목소리여도, 1분이 채 안 되는 시간이어도 목소리를 들을 수는 있었다. 분명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지쳐갔다. 기광은 지쳤다. 공부도, 아르바이트도, 요섭과의 연애도 힘에 부쳤다. 다 놓고 싶은데 공부도 아르바이트도 놓을 수 없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하루, 이틀, 이 주일이 다 되어갈 때쯤 기광은 결론을 내렸다.
“요섭아 우리 그만하자.”
담담해 보이는 말투 안에 담긴 슬픔, 지침, 체념, 그리고 단념. 요섭이 개강 파티, 동아리 회식, 동기의 생일 등등 여러 이유들로 술을 마시느라 받지 못했던 전화 한 통, 두 통 수많은 부재중 기록 속에서 기광은 요섭에 대한 마음을 하나씩 끊어내고 있었다. 처절하게 외로워하고 그리워하며 추억을 정리하고 마음을 접었다.
“나는 네가 필요했어.“
”기광아, 나는···.“
”그냥, 그냥 내 말 들어줘.“
”나 정말 너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어. 너한테 연락을 하는 게 구속이고 귀찮음이 될까 봐 문자 한 통을 해도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보냈어. 너한테 부러움과 섭섭함을 느끼는 내가 너무 싫어서 공부만 했어. 진짜 힘든데 기댈 사람도 말할 사람도 없었어. 나 혼자 외딴섬에 있는 기분이었다고 알아?“
요섭에게 속으로 수도 없이 울며 외쳤던 말들이었기에 더 이상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기광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요섭이 무너져갔다.
우리, 되게 비극적이다. 사랑하는데 헤어진다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핑계일 뿐이라고. 이게 다 너무 사랑해서 그런 거야. 너무 사랑하니까 자꾸 기대하고 실망하고 서운하고 밉고 슬프고. 우리가, 아니 내가 너를 덜 사랑했다면 우리의 결말이 비극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너를 덜 사랑할 수는 없었을 거야. 너와 데이트를 할 때마다 오던 카페였는데, 이제 여기도 마지막이다. 너와 함께하던 모든 곳을 사랑했는데, 이것도 참 슬프다. 헤어져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홀로 붙잡고 있는 연애가 너무 힘들어. 이제 그만하고 싶어.“
기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는 많이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뱉지 못한 마지막 말. 요섭은 자신을 지나쳐 나가는 기광을 잡지 못했다. 말과 표정에 그간 기광이 끝을 내기 위해 얼마나 혼자 힘겨운 날들을 보냈을지 느껴졌다. 기광을, 둘의 관계를 지키지 못한 자신이 너무도 초라해 잡을 수 없었다. 얼음이 다 녹은 미지근한 아메리카노 앞에서 요섭은 울었다.
딸랑딸랑. 자선냄비 앞 봉사자들이 종을 흔들었다. 크리스마스에 자선냄비를 보면 꼭 돈을 넣었었는데. 요섭은 지갑에서 몇 안 되는 지폐를 모두 꺼내 넣었다. 친구들과 술을 진탕 먹고 이틀을 뻗어 있다가 나오니 거리는 이미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물들었다. 크리스마스이브, 모두가 행복해 보이는 거리를 걷는 건 꽤나 힘든 일이다. 케이크 가게로 들어가니 진열대가 휑하다. 빈 진열대를 가만히 쳐다보던 요섭이 나가려고 발길을 돌리자 점원이 불렀다.
”손님!“
”네?“
”혹시 케이크 구매하시려구요?“
”아.. 네. 근데 다 나간 것 같길래.“
”방금 예약 취소된 케이크가 하나 있어서요.“
사실 케이크를 못 사면 그냥 집에 가려고 했는데, 마치 누가 도와주는 것 같다. 크리스마스라서 그런가, 모든 게 다 크리스마스 분위기다. 썰매에 탄 산타클로스와 사슴 눈썰매가 그려진 케이크 박스, 방울이 그려진 리본 끈, 두 개의 눈사람이 올라간 케이크. 일 년 중에 생일보다 더 크리스마스를 좋아하던 기광이었다.
”행복한 크리스마스 되세요!“
점원에 활기찬 인사를 들으며 가게를 나왔다. 두 달. 요섭은 참 많이 울고 힘들어했다. 학교도 안 가고 매일같이 술을 마시며 지냈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기광이 잊히지 않았다. 연락을 해보고 싶었지만 너무 미안해서 차마 하지도 못했다. 머리로는 정리를 하려고 하는데, 마음이 따라주지를 않았다. 매일같이 꿈속에 나오는 기광과 자신이 너무 행복해서 괴로웠다. 모든 걸 잃어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이별한 두 달 동안 요섭이 깨달은 것은 하나였다. 기광이 없으면 안 된다. 아직 늦지 않았다면, 혹시 기광이 자신과 같을 수 있다면. 요섭은 크리스마스의 힘을 빌려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광을 잡아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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