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dow
- 2018년 9월 9일
- 22분 분량
이기광이 죽었단다. 사인은 소사. 현장에 떨궈진 담배에서 녀석의 DNA가 검출되었다고 한다. 더 수사할 필요도 없었다. 녀석이 골초인 것은 코딱지만 한 이 동네에서 모르는 이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모두가 본인의 담배에 본인이 타 죽었다고 의심 없이 결론 내릴 뿐이었다. 그런 이유로 녀석은 죽고 나서도 싸구려 동정조차 받지 못했다.
"이렇게 뒤질 줄 알았으면 한 번 따먹어라도 보는 건데."
"내 말이. 그렇게 꼴리는 얼굴 찾기가 쉽냐."
다만 이러한 이유로는 좀 아쉬워할 뿐. 녀석은 별 볼 일 없는 이 마을에서 별날 만큼 예뻐서, 같은 사내 녀석들의 표적이 되곤 했었다. 이 마을에 유독 여자애들이 없기도 했었고. 아무튼 저들은 시도 때도 없이 녀석에게 창을 던지며 사냥질을 시도했다. 저들의 창은 다양했다. 난잡하게 상기된 눈빛, 우발을 가장한 고의적 터치, 품평하며 깔보는 경박한 언사들. 그 모든 것이 녀석을 향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나의 역할은 그 창들을 다 잡아채서 분질러 놓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상황은, 평소의 나였다면 주먹부터 올라가고도 남았을 상황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폴리스라인을 맥없이 응시하는 것밖에는. 녀석이 죽었다는데, 내가 뭘 할 수가 있을 리가 없잖아.
"시신은요?"
잿가루만 잔뜩 쌓여있는 현장에는 이기광이 피웠다는 담배 말고는 이기광의 그 어떤 것도 없었다. 아직 녀석의 죽음을 내 두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기광을 가장 마지막으로 본 건 이틀 전, 정확히 말하면 36시간 전이었다. 그리고 그때 이기광은 나에게 금연을 약속했었다. 이기광은 말수가 적었지만, 한 마디라도 경솔하게 내뱉는 말이 없었고 무겁게 나온 말을 천금같이 지킬 줄 아는 애였다. 비록 녀석과 알고 지낸 지는 일 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그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이기광이 나와 했던 맹세를 고작 36시간 만에 뒤집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고? 그게 말이 되느냔 말이다.
"다 타고 남은 뼛가루 내가 뿌려주고 오는 길이다. 걔 죽었어. 더는 찾지 마라."
분명 나는 형사 아저씨한테 물었는데, 돌아온 대답은 기철이 형으로부터였다. 그는 조실부모한 녀석을 열여덟이 될 때까지 책임지고 돌봐준 세상 유일한 녀석의 혈육이었다. 물론 표면적으로만. 어쨌든 하나뿐인 녀석의 혈육이 그렇게 말하는데 여기서 더 의문을 제기해봤자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만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묻고 싶었다. 혹시 이기광의 죽음에, 형도 관련이 있나요?
"왜, 뭐?! 너 혹시 나 의심하냐?!"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는데, 흡사 도둑이 제 발 저린 듯 녀석의 형이 당황한 음성으로 내게 되물었다. 숨기려고 했는데, 은연중에 내 눈빛에서 티가 났나 보다. 그제야 내가 표정관리를 못 하고 있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미심쩍은 의혹으로 한껏 힘이 들어간 동공에 애써 힘을 빼며 나는 가까스로 웃었다. 열여덟의 나는 아무 힘이 없었다.
"설마요, 어떤 형이 하나뿐인 동생을."
"그렇지? 죽네 사네 싸웠어도 유일한 피붙인데, 나라고 왜 안 슬프겠냐. 황당하지. 내 동생이 고작 지가 피던 담뱃불에 타 죽었다는 게."
그러니까요. 유일한 피붙이가 그렇게 어이없이 죽었는데, 형은 그게 이렇게 바로 수긍이 돼요? 그 죽음이 진짜로 황당한 거 맞아요? 설사 그 사인이 맞더라도 그럴 리 없다, 더 수사해봐야 한다 난리 치며 현실 부정으로 무너지는 게 더 자연스러운 거 아니에요? 그리고 말은 똑바로 해야지. 죽네 사네 싸운 게 아니라 당신이 일방적으로 괴롭혔잖아. 유일한 피붙이를.
"장례식은요?"
하나뿐인 동생이 죽었는데, 한다는 말이 내 동생을 영원히 기억해 달라도 아니고 왜 더는 찾지 마라인지. 동생이 죽은 지 아직 이틀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형은 어쩜 이렇게 제정신인 건지. 장례식도 거치지 않고 화장하기까지 뭐가 급해서 사후 처리가 그리도 일사천리였던 건지. 형에게 묻고 싶은 게 아주 많았다.
그렇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토록 이기철로부터 이기광을 구원해주겠다 백날 천날 이를 갈았어도, 현실은 나보다 훨씬 이기철이 이기광의 최측근이었기 때문이다. 이기철은 이기광의 '무엇'인가?에 '친형'이라는 명확한 답이 존재했고 그 답은 법적으로도 명시되어 있어서 이기광의 죽음에 모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반면 나는 이기광의 무엇이었나. 친구? 애인? 나는 단 한 번도 이기광을 친구의 감정으로 대해본 적이 없었고, 이기광은 날 어떤 식으로 생각했을지 알 턱이 없으니 아직까지는 난 이기광의 어떤 것도 아니었다. 만약에 이기광이 날 친구 내지는 연인으로 정의해줬다고 해도 그것은 어떤 관념일 뿐 아무런 법적 구속력이 없어서 여전히 나는 이 상황에서 무력했다.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것들을 따진단 말인가.
"장례식 해봤자 파리만 날릴 텐데 그게 더 비참하지 않겠냐. 그래서 바로 뿌려줬다."
뭐 예상했던 대답이다. 이기광에게는 기철이 형과 나. 둘밖에 없었으니까. 오히려 장례식을 하는 것이 더 거추장스러운 일이긴 했다. 따지고 보면 기철이 형의 모든 말과 행동들이 이상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잊지 말아 달라는 말을 삼키고 애써 찾지 말라 대답한 것일 수도 있고, 겉보기에는 제정신인 것처럼 보여도 알고 보니 그 속은 문드러지고 있을 수도 있으며, 장례식장에서조차 고독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절차를 생략한 것일 수도 있다. 기철이 형의 모든 수상함은 다 이런 식으로 해명 가능한 것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는 절대 설명할 수 없는 직감이라는 것이 있다.
"어쩐지 여기 있을 거 같더라니! 이런 거 구경하고 있을 시간 없어! 어서 가자!"
예를 들면 내 어머니처럼. 직감이 아주 예민해서 종종 나를 못살게 굴더니, 지금도 그 직감으로 이렇게 나를 찾아내지 않았던가. 나는 그것이 지긋지긋하면서도 신기해서 언젠가 어머니께 물어봤었다. 도대체 그 무서우리만치 정확한 직감의 비결은 뭐냐고.
-모든 부분에 적용되는 건 아니야. 뭔가를 그만큼 깊게 신경 쓰고 있으면 그것에 한해서만 발동되는 거지. 너를 엄마가 그만큼 사랑하니까.
그 말이 얼마나 지독한 족쇄처럼 나를 휘감았었나. 무튼 나는 이제야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도 아주 온 피부와 혈관으로. 이 사건에는 수상한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고, 이기철은 이 사건을 어떤 식으로든 축소하고 있다. 나에 한해서 무섭게 적용되던 어머니의 직감처럼, 내 직감 또한 이기광에 한해서 무섭게 적용되고 있었다.
"어딜 가요?"
그래서 나는 아직 이 현장을 떠날 수 없다.
"드디어 아버지가 너를 부르셨어. 서울 갈 거야. 이제 네 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거다."
이제 보니 어머니의 눈빛이 조금 낯선 것도 같았다. 한 번도 어머니에게서 느껴본 적 없는 어떤 환희가 어머니를 잔뜩 감싸고 있었다. 그치만 나는 감흥이 없었다. 살면서 그토록 궁금해했던 아버지에 대해 어머니가 최초로 먼저 언급했는데도, 뉴스를 시청하듯 남의 일 같았다. 서울이고 나발이고 어머니, 이기광이 죽었대요. 제 유일한 의미였던 녀석이 세상에서 사라졌대요. 내 세상이 지금 산산조각 나고 있는데, 새로운 세상이 무슨 소용이에요?
"안 가면 안 돼요?"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니? 우리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려왔는데 그런 소리를 해?"
어머니는 기다려왔을지 몰라도 나는 아니었다. 내가 이날을? 오늘이 내가 어떤 걸 잃어버린 날인데.
"짐 다 싸놨어. 지금 당장 떠날 거야. 빨리 안타?"
붙박이처럼 서 있던 내 손목을 낚아채며 어머니는 처음 보는 차를 향해 날 재촉했다. 나는 그저 무력하게 끌려갔다. 끌려가면서도 나에게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이제 구질구질한 거 다 털어내고 새사람 될 생각해."
이기광이 죽었다.
"앞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거야."
이기광이 죽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
내 세계가 명멸했다.
SHADOW
양요섭 X 이기광
W. 기작소
#YS's
건설된 지 20년 이하의 건물이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거의 대부분의 땅이 그린벨트로 지정되어 있고 편의시설과의 접근성이 현저히 떨어져 모두가 기피하는 그런 곳. 수도권과 지방의 경계를 지키고 있는 어떤 마을에서 1년 조금 안 되게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개발이 금지되어 있어서 그곳은 주로 온갖 녹색 식물들로 무성했고, 따라서 멀리서 보면 녹음이 푸르른 청정구역 같아 보였다. 넓은 땅 면적에 비해 쓸 수 있는 땅이 별로 없어서 그 동네는 거진 토박이로만 이루어진 곳이었다. 그 말인즉슨 아주 폐쇄적인 장소였다는 것이다. 10년 동안 그 어떤 외부인도 발을 들이지 않았다던 그곳에 나라는 이방인이 등장했으니, 나에 대한 주민들의 집요한 관심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게다가 난 보편적인 가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편모에다가 아버지는 누군지조차 몰랐으니까. 충분히 눈에 띌 만했다. 혼자 자식을 키우는 미혼모에게 일반적으로 따라붙는 뻔한 추문들이 나와 어머니에게도 관용 없이 따라붙었다. 그러나 난 누가 그러건 말건 별 상관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심지어 나는 그 어떤 것에도 감흥이 없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다섯 살 때였나, 다른 애들은 다 있는 아버지가 왜 나는 없는지 궁금해서 어머니께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어머니는 때가 되면 알게 될 테니 일단은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말고 당신이 시키는 대로만 살면 된다며 내 정체성을 차단시켰다. 내 속은 텅 비어있었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양요섭이라는 이름 석 자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면 18년을 살도록 내가 누군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는 소리다. 진짜로 내 나이가 18살은 맞는지, 양요섭이라는 이름이 진짜 내 이름은 맞는지 사실 그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숨죽여 지내야 했다. 내가 왜 이 동네로 이사 왔는지조차 어머니는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다만 최대한 눈에 띄지 말고 있는 듯 없는 듯 살라는 신신당부만 있을 뿐이었다. 이쯤 되면 그녀가 진짜로 내 어머니가 맞는지도 의심해봐야 할 상황이었다.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고사하고 내 신상정보조차도 모르는 내가 참 등신 머저리 같아서 마음에 안 들었다. 자기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이 지식은 채워서 뭘 해?라는 생각으로 학교 수업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쌓여가는 것은 체념뿐이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조차도 알 수 없으니 삶의 의미라던가 목적 같은 게 생길 리 만무했고, 해서 나는 기계적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
그래. 그때의 난 그 어떤 것도 아니었다. 세상에 불시착한 낯선 몸뚱아리였을 뿐.
-아직 어떤 것도 아닌 거면 가능성은 무한한 거 아냐? 그럼 좆대로 생각하면 되지 뭐가 문제야.
그런 내게 이런 말을 건네준 애가 있었다. 그 애는 이 동네에서 유일하게 학교를 안 다니는 열여덟 살이었다. 공교육은 제대로 받지 못했어도, 세상을 보는 시각이라던가 사람을 꿰뚫는 통찰력은 대단한 애였다. 나는 나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최악만을 생각했었다. 내가 원치 않는 성행위로 태어난 아이라든지, 아버지가 끔찍한 범죄자라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그런 게 아니면 은폐할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까. 그저 최악이라도 상관없으니 빨리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서 지긋지긋한 무지의 삶이 빨리 끝나기를 고대했을 뿐이다. 내 정체성을 외부에 맡겨버린 것이다. 녀석은 말 한마디로 그런 내 세계를 깨부쉈다. 나는 아무도 나에 대해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서 등신 머저리였던 것이 아니라, 단 한 번도 나를 스스로 정의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등신 머저리였던 것이다.
-부럽다. 나도 아직 뚜껑 열기 전이였으면 좋겠네.
내게 그런 충격적인 깨우침을 가르쳐 준 당사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외부로부터 결정된 정체성에 온몸이 결박된 녀석이었다. 아직 정해지지 않은 나와 달리 녀석은 이미 정해진 뒤였다. 그것도 아주 최악으로. 녀석은 이 동네에서 제 이름 석 자보다 살인자의 아들로 불렸다.
-나도 내가 누군지 모르고 싶다. 근데 이상하지. 너랑만 있으면 자꾸만 까먹어. 내가 누군지.
시뻘건 머리카락에 시퍼런 멍을 트레이드 마크처럼 달고 다녔던 그 녀석의 이름은 이기광이었다. 처음 녀석을 보고 그 이름을 들었을 때 내 몸에 흐르던 전율을 나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이기광의 첫인상은 불같았으니까. 붉기도 하고 푸르기도 한 불. 녀석은 불처럼 빛나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익명이 된 것 같아. 너 그게 얼마나 짜릿한 건지 모르지?
18년을 살도록 나 자신 하나 정의 내리지 못하고 익명처럼 떠돌았던 내게 녀석의 그 말은 붉은 유혹이자 푸른 위로였다. 나로 인해 짜릿해진다고 했다. 어떤 주체가 된 기분이었다. 최초로 내게 욕망이라는 것이 생겼기 때문이다. 텅 비었던 내 안이 이기광으로 뜨겁게 차올랐다. 내가 누구한테서 태어났든, 내가 어떤 사람이든 그저 이기광의 무엇으로 기능할 수 있다면, 나는 평생 내 정체를 모르고 살아도 좋을 것 같았다. 아니, 그게 내가 내 좆대로 정의한 내 정체성이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익명이 되는 것이 얼마나 짜릿한 건지는 몰라도, 누군가로 가득해지는 것이 얼마나 짜릿한 건지는 알아졌다. 이기광으로 채우려고 내가 그동안 내 안을 텅 비워뒀구나.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그만큼 나는 이기광에게 단단히 미쳐있었다.
불을 닮은 녀석은 본의 아니게 불과 가까이 지냈다. 모두가 기피하는 고등학교 소각장 일을 자처했기 때문이었다. 아무 대가도 안 받고. 학교 측에서는 관리를 위한 인력을 아낄 수 있어서 좋고, 학생들 측에서도 당번을 피하기 위해 실랑이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장사였다. 쨌든, 그곳에서 이기광을 처음 만났으니 내게는 참 은혜로운 곳이 아닐 수 없었다.
전학 온 첫날이었다. 종례 후 건물을 나서던 중, 구조가 익숙지 않아 출입문을 착각했었다. 뒤뜰 소각장으로 향하는 문이었는데, 문 손잡이를 밀자마자 별안간 강한 충돌이 일었다. 나가려던 내 가슴팍에 들어오려던 누군가의 몸이 제대로 맞부딪힌 것이다. 그 누군가는 마찰을 이기지 못하고 내 발치에 왈칵 넘어져 버리고 말았다. 작고 빨간 머리를 가진 애였다. 살면서 저렇게 새빨간 머리는 난생처음이었던 나는 홀린 듯이 그 빛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뒤이어 붉은 머리가 젖혀지며 푸른 눈이 나타났다. 눈동자가 푸른색이었던 것은 아니고 한쪽 눈 주변이 온통 푸르딩딩했다. 순간 놀라버린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나랑 부딪히는 바람에,
-원래 이랬던 거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머리색처럼 빨간 입술 사이로 뱉어진 목소리가 멍처럼 시퍼레서 듣는 내 귀 또한 욱신거리는 듯했다. 나도 모르게 녀석을 향해 내밀어져 있던 내 손을 내치고 저 혼자 아무렇지 않게 일어난 녀석은 가려던 길을 마저 재촉하고 있었다. 날이 선 몸짓이었다. 왠지 모르게 조급해졌다.
-내가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데?
그런 나머지 나는 대충 아무 질문이나 꺼내 일단 녀석을 붙잡았다. 어쩐지 이대로 놓쳐서는 안 될 인연이라는 예감이 강하게 엄습해오고 있었으므로.
-존나 미안한 눈.
녀석은 고작 1점 자리 문제의 정답을 내어놓는 것처럼 쉽게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더욱더 당혹스러워졌다. 그것은 살면서 내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살았으니 미안할 짓 또한 할 일이 없었다. 그저 그런 감정은 교과서로만 배웠을 뿐이다. 그런 감정을 처음으로 느껴 본 것만으로도 모자라서 느끼자마자 생판 모르는 초면에게 들켜버렸으니 나로서는 패닉이 아닐 수 없었다. 날 18년을 키운 내 어머니조차 내 속을 못 맞추시는데. 따라서 그동안 나는 나에게조차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런 나를 녀석은 허무하리만치 손쉽게 읽어내 버린 것이다. 내가, 미안해하고 있었구나.
-너랑 부딪혀서 이렇게 된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고 가라고.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심하게 나를 관통하는 시퍼런 눈이 내 몸을 휘감아서 나는 한참 동안을 그 자리에 붙박이처럼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불을 닮은 녀석은 첫 만남부터 내 안에 저를 점화시켰다.
그 이후로 내 관심은 온통 녀석에게 쏠려있었다. 나는 틈만 나면 녀석에게 찰거머리처럼 붙어 다녔다. 그 과정에서 나는 녀석의 이름이 이기광이라는 것과, 범죄자의 아들이라 학교에 다니지 않고 그 학교의 쓰레기를 처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 그 와중에도 쓰레기 더미에서 쓸 만한 책들을 몇몇 개 찾아 독학하고 있다는 것 등등을 알아낼 수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공부를 하려고 하냐는 나의 질문에 무시당하기 싫어서라고 대답할 정도로 자존심이 센 애였다. 그래서 나는 녀석과 거래를 했다. 매일 방과 후에 그날 배운 것들 다 가르쳐 줄 테니 너는 나랑 놀아주기만 하면 된다고. 녀석은 나쁘지 않다는 듯 흔쾌히 그러자고 했고, 자존심이 상할법한 제안일 수도 있는데 내게 만은 어쩐지 관대해지는 듯한 녀석의 태도에 내심 벅차오르기도 했다.
쨌든 나는 녀석과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쉬이 나를 받아주지 않을 것 마냥 무심함의 극치를 달렸던 첫인상과는 달리 녀석은 의외로 빨리 마음을 열어줬다. 그 특권으로 나는 녀석에게 이것저것 궁금한 것들을 물어볼 수 있었다. 나는 숨 쉬는 횟수보다 더 녀석이 궁금했고 알아도 알아도 더 알고 싶었다. 내가 누구고 어디에서 왔는지 그런 것은 이제 나의 관심 밖이었다. 그림자처럼 이기광을 따라다니는 것만이 그 시기의 내 유일한 관심사였다.
-머리는 왜 그렇게 물들인 거냐?
일단 나는 녀석의 붉음에 대해 물었다. 새빨간 머리는 단지 취향일 뿐인 것인지 아니면 어떤 사연이 있는 건지. 취향이라면 앞으로 녀석에게 무언가를 해 주고 싶을 때 고려할 수 있는 유익한 정보가 될 것이고, 사연이 있는 거라면 그 사연을 기반으로 녀석을 대할 때 더욱더 신중할 수 있을 것이다. 녀석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뭐, 싫으면 안 말해줘도 돼.
-재밌어서.
그렇다고 싫은 대답을 굳이 억지로 받아내고 싶은 건 아니었기에 이쯤 접어두고 다른 화제로 넘어가려는데 예상치 못한 대답이 날아왔다.
-쟤네들, 나 학교 안 다닌다고 존나 무시하면서도 내가 이러고 다니는 건 또 엄청 부러워하거든. 그냥 그게 우스워서. 빨간색인 건 존나 튀라고.
스포츠머리가 두발 규정인 이 학교 남자애들은 죄다 머리에 까만 밤송이를 하나씩 얹고 다녔다. 그에 비해 이기광은 빨간 머리에 귀까지 뚫고 다녔으니 단연 돋보일 만했다. 게다가 입고 다니는 것은 죄다 명품. 학교도 못 다니는 살인자 핏줄 주제에 뭐 저렇게 쓸데없이 꾸미고 다녀? 따라서 이것이 이 학교 애들이 이기광에게 갖는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나는 이 상황이 퍽 흥미로웠다. 시스템은 보편성과 안정성도 제공해주지만, 빡빡하고 답답한 규칙 또한 제공한다. 이기광은 낙인 때문에 완벽하게 시스템 밖으로 밀려난 애였다. 그런 이기광을 보며 시스템 안에 있는 애들은 내가 쟤보단 낫네, 같은 우월감에 안도하면서도 규칙이라는 속박에서 벗어난 이기광의 방종은 또 욕심내는 것이다. 똑같은 교복과 똑같은 머리를 한 서로를 보면서 소속감을 느끼면서도 소속되기 위해 지켜야 할 것들에 대해서는 숨 막혀 한다. 네가 나 같고 내가 너 같고, 그런 게 재밌을 리가 없다. 그들과 완전히 다른 이기광이 그들의 흥밋거리가 되는 것은 필연적인 거였다. 그들은 화려한 이기광을 흥미로워하다가 급기야는 선망하기에 이르렀는데, 그걸 인정하는 것은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으므로 죽일 듯이 후려쳤다. 본인들 부모의 한 달 월급보다 비싼 셔츠를 입고 다니는 이기광을 보고 싸 보인다는 둥 헤퍼 보인다는 둥 온갖 저속한 말로 이기광을 밟았다. 근데 또 웃긴 것은 그렇게 헤픈 이기광과 자고 싶어 하지 않는 놈이 한 놈도 없었다는 것이다. 시스템이 주는 안락함은 놓고 싶지 않으면서도 호시탐탐 시스템 밖으로 엇나가고 싶어 하는 그들에게 이기광은 가장 적합한 먹잇감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살인자 아들이니 그래도 된다는 그들 나름의 정당성까지 있었으니 어련했을까. 그러나 이기광은 그들에게 순순히 먹혀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녀석도 만만치 않은 성깔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래서 저렇게 패기롭게 예쁠 수 있는 것이다. 사회적으로는 명백하게 그들보다 밑이었지만, 정신적으로는 몇천 걸음 앞서있는 녀석이 나에게 흥미롭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런 흥미가 의미가 되고 기어코 내 전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녀석은 약함과 강함이 공존했다. 세상의 울타리 밖에서 혼자 다니는 모습이 한없이 유약해서 나의 보호본능을 미치게 자극하다가도, 나에게 그만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이 절대적으로 강인해서 나를 불안하게 했다. 이상한 것은 그 불안이 썩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저 녀석으로 인한 느낌이라면 그게 어떤 느낌이든 간에 더 심혈을 기울여 감각하고 싶었고, 미세한 무엇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무튼 녀석의 빨간색에 대해 알게 된 나는 이제 녀석의 파란색이 궁금해졌다. 그 예쁜 얼굴에 퍼런 멍은 왜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는 건지. 도대체 어떤 새끼가 그래놓은 건지.
-그 눈은 저 새끼들이지? 정확히 이름 대봐. 내가 족쳐놓고 오게.
그러나 그것은 굳이 묻지 않아도 심증만으로 충분히 추론해낼 수 있는 문제였다. 이 학교 애들에게 녀석이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는 나 또한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까. 다만 내가 추린 용의자 집단 속에서 구체적인 개인이 알고 싶은 것이었다. 알아야 그 자식도 똑같이 만들어주지.
-아니. 쟤들 절대 나한테 손 못 올려.
이번에도 뜻밖의 대답이었다. 녀석은 내가 추린 용의자 집단 자체를 부정했다. 한 번 더 곰곰이 생각해보니 맞는 말인 것도 같았다. 그토록 이기광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 저들은 녀석을 잡아먹는 척 허세만 부렸지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물리적 폭력도 행사하지 못했다.
-우리 형이 깡패거든.
그리고 뒤이어진 이기광의 말에 나는 저들이 무척 우스워졌다. 그 이유가 너무나 저들다워서. 입으로는 이기광을 아주 불가촉천민 취급을 하더니 깡패인 녀석의 형은 또 무서워서 몸을 사린다는 것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주제에 누굴 멸시해. 나의 질문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러면 녀석의 눈가를 퍼렇게 물들인 진짜 범인은 누구인가.
-그럼 그건 누가 그런 건데?
-그 깡패가.
이기광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은 내내 충격의 연속이었다. 실종된 살인자 아버지에 동생 눈을 시퍼렇게 만들어놓는 깡패 형. 녀석은 나와 비교도 되지 않을 기막힌 인생을 숙명처럼 지고 다녔다, 그러면서도 제 인생을 대하는 태도는 지나치게 무심하고 덤덤해서 보는 내 마음이 더 먹먹해졌다. 상처를 받을 대로 받아 무뎌져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닐 것이다. 무뎌진 상처도 아픈 건 매한가지니까. 다만 그게 녀석 최후의 자존심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알아졌다.
-예쁜 게 죄지. 이렇게라도 안 하면 자꾸 누가 채간다잖아.
-형님께서 뭘 모르시네. 그렇게 해놓으셔도 틈만 나면 채갈 생각뿐인 사람 여깄는데.
그래서 농담처럼 내뱉는 녀석의 자뻑에 나도 농담처럼 응수해줬다. 사실 농담을 가장한 진담. 이기광을 알게 된 후, 나는 매일 밤 녀석을 채가는 꿈을 꿀 만큼 녀석을 원했으니까.
그리고 며칠 뒤, 그 꿈을 최대한 서둘러 현실로 실행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사건이 일어났다. 소각장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녀석이 나타나지 않자, 걱정되어 찾아간 녀석의 집 앞에서 내 두 눈으로 목격해버리고 만 것이다. 녀석의 눈두덩이 시퍼레지는 과정을. 하늘이 온통 시커먼 먹구름으로 뒤덮인 날이었다.
-그거 당장 안 내놔?!!
-형, 제발 이것만은..!
무언가를 꽉 쥔 채 몸을 잔뜩 웅크린 녀석이 저보다 세 배는 커다란 거구에게 사정없이 맞고 있었다. 녀석의 눈두덩이를 그렇게 만들었다던 깡패 형이 저 사람인가. 말로 들었을 때는 사실 그 폭력이 잘 상상이 안 갔는데 실제로 맞닥뜨리고 보니 이 상황은 농담처럼 취급될 상황이 아니었다. 때리는 자는 압도적으로 험악했고, 맞는 자는 한없이 작아서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순간 피가 거꾸로 솟으면서 눈이 뒤집혔다. 나도 모르게 올라간 주먹이 녀석의 형에게 꽂혔다. 제아무리 녀석의 혈육이라 해도, 녀석에게 위해를 가하는 순간 나에게는 적일뿐이었다. 녀석이 말리지만 않았어도, 울며 애원하며 내 멱살을 잡고 매달리지만 않았어도 나는 그 주먹을 녀석의 형에게 열 대고 백 대고 내리꽂을 수 있었다. 피떡이 된 엉망진창의 얼굴이 내 속까지 피떡으로 만들어놨다. 우리가 이러고 있는 틈을 타, 나동그라진 녀석의 형이 역습을 노리는 게 느껴졌다. 그때 따뜻한 것이 내 손목을 감싸왔다. 녀석의 손이었다. 제 형의 주먹이 내게 내리꽂히기 일보 직전에 녀석은 내 손목을 꽉 잡고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그 순간 무게를 견디지 못한 먹구름이 세찬 빗줄기를 토해냈고, 그 빗물 속에서 우리는 한참 동안 달렸다. 그리고 나는 거짓말처럼 환희에 들떠 있었다. 금붕어 마냥 몇 분 전의 분노를 까맣게 잊은 채 열락으로 빗속을 헤엄치고 있었다. 처음이었다. 녀석이 먼저 나를 잡아챈 것은. 그것만으로도 나는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서 이대로 죽는대도 여한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때 내가 맞고 있는 것은 빗줄기가 아니었다. 빛줄기였다.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무수한 빛들이 나를 흠뻑 적셨고 그 빛은 녀석도 적셨다. 태어나서 이토록 시원하고 달콤한 비는 처음이라, 나는 놀이동산을 처음 가보는 어린아이 마냥 들떠 있었다. 구름 위를 달리는 것 같았다.
이기광이 내 손을 잡고 향한 곳은 퀘퀘한 굴다리 밑이었다. 비를 피하기에도, 도망쳐 숨어있기에도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그곳에서 녀석의 상처부터 살피는 내게 녀석은 요령껏 잘 맞았으니 괜찮다며 또 덤덤하게 웃었다. 이럴 때는 아픈 것보다 더 아픈 척 엄살도 부리고 그래도 되는데 의연하기 그지없는 녀석의 미소가 미워서 그 요령은 얼마나 맞아야 생기는 거냐고 따지려다가 관뒀다. 이제 막 아물어가려던 눈가에 다시금 퍼렇게 생긴 새 멍이 기가 막혀서.
벽에 기댄 채 허공을 바라보며 녀석은 몇 번 한숨을 내쉬다가 주머니 속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러고 보니 굴다리 안에 희미하게 담배 냄새가 배어있는 것 같기도 했다.
-너 담배도 피냐?
-약도 빨아본 적 있어.
이제 더는 놀랄 것도 없었다. 짧게나마 지켜본 녀석의 인생은 충분히 그래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으니까. 그저 나는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내 눈빛이 광막한 녀석의 인생에 조그마한 빛이라도 되어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익숙하게 담배에 불을 붙인 녀석이 필터를 한 번 깊게 빨아들이자, 담뱃불이 붉게 반짝였다가 잿빛으로 변했다. 그 광경을 열없이 바라보던 내 눈가에는 별안간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네가 빨아들이는 담뱃불이 너무 예쁘게 반짝여서 나는 네가 별들을 빨아들이는 줄 알았다. 해로운 그것마저도 참 예쁘게 피우는 네 모습이 내 눈 속에 시리게 박혀서.
-너도 필래?
새 담배를 내 앞에 내밀며 다시 한 번 필터를 깊게 빨아들이는 녀석에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담배는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나는 이기광을 피워보고 싶었다. 나는 뿌옇게 물기를 매단 눈을 하고 무언가에 홀린 듯 녀석에게 다가갔고, 따뜻하고 포근한 감각에 정신을 차린 순간에는 내 입술이 녀석의 입술과 맞닿아버린 뒤였다. 그리고 내가 실수를 자각하기도 전에 믿을 수 없게도 녀석의 입술이 열리고 있었다. 녀석이 빨아들인 매캐한 별들이 내 입안으로 밀려와서 찬란하게 부서졌다. 나는 정신없이 녀석의 혀를 휘감았다. 그제야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녀석이 뿜어낸 연기로 자욱한 굴다리 속에서, 나는 녀석에게 속절없이 빨려 들어갔고, 내 안은 곧 이기광으로 자욱해졌다. 맵고 짠 첫 키스였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인데, 그 굴다리는 10년 동안 녀석만의 아지트였다고 한다. 그곳을 독점하려고 일부러 그곳에 귀신들이 득실거린다는 소문까지 지어내 퍼뜨렸다고. 그 정도로 녀석이 아꼈던 곳에 최초로 초대된 손님이 나였다고. 그런 말들을 녀석은 이제 내가 묻지 않아도 먼저 조잘거려줬다. 한때는 그토록 날 선 무심함으로 무장하고 있던 녀석이 점점 유해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참 경이로운 일이었다.
-부탁이 있는데, 너 담배도 끊고 소각장 일도 관두면 안 되냐?
그래서 나는 오래전부터 속으로만 달싹여왔던 부탁을 건넸다. 어쩌면 주제넘는 참견일 수도 있겠지만 이제 그 정도 참견은 해도 되는 사이잖아.
-왜?
-니가 나쁜 연기 들이마시는 게 싫어.
직설적인 내 대답에 녀석의 동공이 잠시 흔들리더니 흔쾌히 그러겠다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곤란해할 줄 알았던 녀석이 너무도 쉽게 내 부탁을 들어주자 어쩐지 허무해졌다. 어렵지 않게 받아낸 약속이 가벼워질까 봐 나는 몇 번을 되물어 녀석의 확답을 받아냈고, 결국 녀석은 주머니 속의 모든 담배를 내게 내놓는 것으로 쐐기를 박았다. 분명 녀석은 해로운 연기조차 예쁘게 마셨지만 나쁜 것은 나쁜 것이었으니까. 이제 더는 녀석이 나쁜 연기를 마시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나는 날아갈 듯 기뻤다. 나는 파란 꿈을 꾸고 있었다. 녀석에게 해로운 담배와 소각장은 이제 해결했으니 2년만 잘 버텨 성인이 되면 틈만 나면 녀석을 때리는 이기철로부터 이기광을 구해줘야지. 네 주변의 어두운 것들은 내가 다 치워줄 거야. 18년 동안 너를 가둔 세상의 그림자 속에서 내가 널 해방시켜 줄게. 조금만 기다려줘.
36시간 후면 깨질 허황된 꿈에 취해서 나는 그날 밤 온 동네를 뒤덮은 매캐한 연기를 맡지 못한 것이다. 너를 데려간 그 검은 연기를. 그날 이후 빛은 사라졌다. 아주 저 멀리로.
녀석이 죽고 어머니 손에 이끌려 내가 떨궈진 곳은 에이 그룹 대저택 앞이었다. 어머니는 18년을 숨죽여 키워온 자식을 그 집에 밀어 넣고 사라졌다. 그리고 내겐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생겼다. 그제야 뚜껑이 열리고 내 정체가 드러난 것이다. 나는 기업의 후계자가 될 사람이었다.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어머니는 제아무리 재벌가의 핏줄을 품었어도 그 집의 일원이 될 수 없었다. 잇속이 밝은 아버지는 여자 때문에 제가 가진 것을 놓아버릴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핏줄은 달랐나 보다. 당시 서 의원의 딸, 그러니까 지금의 새어머니와 결혼을 앞두고 있던 아버지는 날 품고 있는 어머니에게 제안을 했다. 자기 처가에 들키지 말고 아이를 잘 키우고 있으면 적당한 때에 데리러 오겠다고. 재벌가 안주인이 되려다가 다 망칠래? 자식이라도 그룹 후계자로 만들래. 어머니는 후자를 택했고 나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언젠가 그룹 후계자가 될지도 모르는 아이로 성장했다. 나만 모르게.
에이 그룹은 손이 귀한 가문이었다. 셀 수도 없는 여자들을 만났던 할아버지도 겨우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둘밖에 얻지 못했고, 아버지 또한 나 말고는 자식이 없었다. 아마 나 말고 다른 자식이 생겼다면 아버지는 나를 영원히 찾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어머니는 아버지만을 하염없이 기다렸겠지. 쨌든 아버지가 날 부른 목적은 작은아버지가 늘그막에 얻은 5살짜리 아들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동생의 핏줄로 후계가 이어지는 것을 눈뜨고 지켜볼 성미가 아니었으니까. 그날부터 아버지의 스파르타식 경영 교육이 이어졌다.
일반적으로 자기가 알고 보니 재벌가 후계자였다면 그것을 거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머니도 분명 그렇게 생각하셨을 거다. 당연히 내가 아싸 개이득 하며 좋아할 줄 알았겠지. 그래서 18년간 나를 속여가면서까지 숨죽여 날 키워냈겠지. 그래. 가난한 것보다는 부자인 것이 낫고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나으니까 분명 나도 그랬을 수도 있었다. 이기광을 몰랐다면. 그러나 이기광을 알아버린 지금, 에이 그룹 후계자는 나에게 그다지 구미가 당기는 먹잇감이 아니었다. 그것보다 훨씬 찬란하고 달콤한 것을 이미 맛봐버려서 에이 그룹 후계자는 너무도 시시했다. 그것은 나에게 조금의 위안거리조차 되지 못했다.
에이 그룹 대저택은 빛나는 것들의 향연이었다. 벽면에는 번쩍이는 황금이, 발밑에는 매끈한 대리석이, 천장에는 반짝이는 다이아 샹들리에가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눈을 돌리는 모든 곳들이 빛 천지였다. 이곳에는 빛의 포식자들이 살았다. 배가 터질 만큼 과식하고도 모자라서 상대보다 더 빛을 많이 삼켜내기에 급급한 자들. 그 전쟁은 주로 식탁 위에서 고고하고 우아하게 벌어졌다. 할아버지는 갑자기 나타난 출처 모를 손자인 나보다 작은아버지가 늦게 본 다섯 살 난 손자에게 더 마음이 쏠려있었다. 오늘 아침에는 그 아이의 숟가락에 청담동 건물이 얹어졌다. 그렇지만 그 아이는 그것을 삼켜내지 못하고 토해낼 것이다. 그리고 걔가 토해낸 그것은 머지않아 나의 숟가락에 올라가겠지. 내 아버지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아버지는 매일매일 더 번쩍이는 빛들을 훔치고 빼앗아서 내 입속에 억지로 떠먹였다. 매일 들어도 몇 퍼센트인지 헷갈리는 에이 그룹 지분과 자잘한 계열사들. 그리고 몇 개의 건물들과 평생 써도 닳지 않을 어마어마한 액수가 내 몫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내 마음은 그것들에 발붙이지 못하고 매일 도망쳤다. 녀석이 타 죽었다던 그 현장으로. 아버지가 내게 떠먹여주는 빛들은 지나치게 휘황찬란해서 되려 멀미가 났다. 소화시킬 수가 없어서 삼키는 족족 게워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다른 빛을 그리워했다. 쓰레기가 타들어갔던 네 소각장의 불빛, 네가 별처럼 들이마셨던 담배 빛, 우리를 흠뻑 적셨던 빗줄기의 빛. 그리고 네가 가진 붉고 푸른빛. 그것들이 소소하게 반짝였던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그때가 내겐 가장 눈부셨던 순간이었다.
나는 내 목에 걸린 반지를 열없이 만지작거렸다. 그것은 녀석이 형에게 그토록 맞아가면서까지 지키려던 제 어머니의 유품이었다. 녀석은 그것을 내 손에 쥐여주며 조만간 찾으러 올 테니 잠시만 맡아달라고 했었다. 마지막 남은 어머니의 유품이라면서. 이것만큼은 절대로 형이 팔아먹게 냅둘 수 없다면서. 녀석이 내게 건넨 것은 반지였지만, 실은 아주 깊은 신뢰를 건넨 것임을 나는 알았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게 목걸이로 만들어 늘 걸고 다녔다. 맡아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 나는 그 약속을 이렇게 잘 지켜내고 있는데, 너도 조만간 찾으러 오겠다는 약속을 어서 지켜줘야지 기광아.
널 만나기 전 내 시간은 0의 시간이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의미 없는 시간. 그곳에서 나는 아무것도 감각할 수 없었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맡아지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진공 속에서 부유하는 육천오백칠십일가량이 내가 설명할 수 있는 내 인생의 전부였다. 나는 그 시간을 수치스럽게 여기며 살아왔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너는 그토록 남루했던 내 세계의 첫 손님이었다. 너도 나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체구에 나랑 비슷한 해를 살아왔고 그렇게 대단한 삶을 가진 것도 아니었는데 나의 대지였고 하늘이었으며 태양이었고 별이었다. 너는 내 광막한 진공 속으로 들어온 한 줄기 빛이었다. 아무런 의미 없이 시간만 축내고 있던 내 세계에 너는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건 기쁨이고 이건 슬픔이야. 이건 절망이고 이건 희망이야. 이건 빛이고 이건 어둠이야. 너는 마비되어 있던 내 감각을 일깨워냈다. 나는 네가 이름을 붙여준 것들에게 의미를 부여했다. 가령 이렇게.
나에게 기쁨이란 너와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의 감정이고 나에게 슬픔이란 네가 내 곁에 없는 모든 순간의 감정이다. 나에게 절망이란 네가 사라져서 영영 돌아오지 않을 거란 확인사살이고 나에게 희망이란 떠나간 네가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는 믿음이다. 나에게 빛이란 이기광이고 나에게 어둠이란 이기광 없는 양요섭이다.
이런 식으로 나는 나의 모든 것들을 정의했다. 의미가 없던 것들에게 의미를 부여해주고 나니 고요하던 것들이 숨소리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숨 쉬고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처음으로 내게 가르쳐 준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 죽었단다. 나에게 온갖 진귀한 것들이란 것들은 다 맛 보여주고 저는 홀랑 떠나버렸단다. 치사하게 줬다가 뺏냐.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 낫지 있었다가 없어지니까 뻥 뚫려버린 구멍 속으로 내 전부가 무너져내렸다. 파도처럼 들이닥치는 그리움과 온몸이 으깨지는 듯한 상실감은 그 어떤 마취제도 듣지 않는 끔찍한 통증이었다. 진정한 어둠이었다. 이기광은 내게 빛도 가르쳐줬고, 어둠마저 가르쳐줬다.
그래도 나는 아직 숨 쉬고 있었다. 고통에 신음하는 가쁜 숨일지라도 아직 내게 붙어있었다. 너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내 불신이 나를 아직까지 살게 했다. 그러니까 너는 아직 죽지 않았다. 여태까지 지워지지 않은 내 존재가 그 증거였다. 너를 잊는다는 것은 나 역시도 지워진다는 것이었으니. 그런 나의 확신을 두고 이제 그만 너의 부재를 인정하고 놓아주라며 찬물을 끼얹는 세상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내 앞날을 위해 내 인생에서 사라져줬던 어머니 또한 끝없이 과거만을 거슬러가는 내게 다시 나타나서 제발 좀 내일을 살 생각을 하라며 가슴을 치며 울었다. 어머니는 아직도 착각을 하고 있었다. 아직도 본인의 뜻대로 나를 움직일 수 있을 거라는 착각. 다 크면 에이 그룹으로 채우라고 비워 키운 내 속을 나는 온통 이기광으로만 채워 넣었으니 그곳에는 어머니의 뜻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어머니는 나를 이렇게 만든 너를 망령 취급하며 저주했다. 너의 망령이라도 좋았다. 그렇게라도 너와 다시 만나 함께하고 싶은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어둠 속에 흐느끼며 네 이름을 불러대는 것밖에 없었다.
그런 내 부름에 거짓말처럼 대답이 들려왔다. 그토록 그리웠던 너의 음성이. 귀를 의심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나는 너와 첫 키스를 나눴던 굴다리 밑에 서 있었다. 그곳에는 네가 있었다. 여전히 눈부신 얼굴로.
#GK's
여덟 살 때 어머니가 죽었다. 죽인 사람은 아버지. 따라서 나는 피해자의 자식이기도 했고 가해자의 자식이기도 했다. 그런 나를 사람들은 주로 가해자의 자식으로 분류했다. 피해자의 자식을 동정하는 쪽보다 가해자의 자식을 질타하는 쪽이 더 쏠쏠했으니까. 만만한 사람 하나 제 발밑에 두고 짓밟으며 본인의 우월감을 과시하는 낙으로 사는 부류의 사람들에게 나는 아주 최적의 동네북이었다. 어딜 가나 나에게는 살인자 자식이라는 낙인이 따라붙었고, 세상은 낙인이 새겨진 자에게 양지바른 곳을 허용하지 않았다. 내게 허락된 곳은 춥고 컴컴한 음지였다. 그곳에는 형도 있었다. 아버지는 5년형을 살고 나와 어디론가 사라졌으니 실질적으로 내게 남은 유일한 혈육이었다.
나와 형은 자주 충돌했다. 형은 아버지에게 고분고분하지 못해 결국 일을 당하고 만 어머니를 증오했고, 나는 나에게서 하나뿐인 어머니를 앗아간 아버지를 증오했으므로. 친탁을 해서 기골이 장대한 형과 달리 외탁을 한 나는 작고 왜소한 체구를 갖고 있던 탓에 주로 그 충돌은 내가 일방적으로 맞는 양상으로 벌어졌지만, 어쨌든 형은 재능을 살려 깡패 조직에 들어갔다. 문제는 나였다. 꼬리표 때문에 학교도 못 다니는 주제에 공부로 성공하긴 글러 먹었고, 형처럼 사람을 잘 패는 재주도 없었던 나는 그 어떤 곳에도 발붙일 수 없었다. 그래서 매일 밤, 눈을 감으면서 그 눈이 영영 떠지지 않아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던 것 같다.
그런 내게서 뜻밖의 재능을 발굴해낸 사람이 있었다. 형이 몸담은 조직 보스의 오른팔 노릇을 하던 아저씨였다. 그 아저씨는 나를 보고 얼굴만 팔아먹고 살아도 평생 굶어 죽진 않겠다며 기립박수를 쳤다. 아저씨는 종종 갖가지 비싼 옷과 액세서리들을 사 와서 나를 꾸미길 즐겼고, 나에게 걸쳐진 휘황찬란한 명품들을 바라보며 배알 꼴려 하는 동네 애들의 시선은 어쩐지 꼬시기도 해서 나는 아저씨가 나를 꾸며주는 대로 그냥 내버려 뒀다. 양지바른 세상의 울타리 속에서 안락하면 됐지 이따위 옷들이 뭐가 부럽다고 저 지랄들인 건지 우스워서 나는 아예 염색까지 해버렸다. 아주 시뻘건 색으로다가. 공허한 정신승리래도 상관없었다. 뭔가를 부러워하는 감정을 그들도 경험해봤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 또한 꼬일 대로 꼬여 있었다.
그렇지만 사실 외로웠다.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혼자 더러운 삶은. 그래서 소각장 일을 자처했다. 다들 내가 아버지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하여 그걸 자처한다고 판단했지만 나는 그래서 그 일을 자처한 것이 아니었다. 거긴 쓰레기들이 나뒹구는 곳이었다. 나와 닮은 나의 동지들이. 그곳은 모든 것들이 다 더러워서 굳이 내 지저분함이 눈에 띄지 않았으니 내게는 가장 편한 낙원이었다. 그곳에 양요섭이 끼어든 것이다. 양요섭은 내가 살면서 유일하게 만나본 순수한 사람이었다. 제대로 앞을 못 봐서 부딪힌 건 난데, 되려 본인이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던 표정에서 딱 느낄 수 있었다. 양요섭은 불길 주위를 맴도는 불나방처럼 집요하게 나를 따라다녔다. 나는 떨궈줄 떡고물이 한 알도 없는 사람인데도. 순수한 영혼이 아니면 그것은 절대로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마음을 열어 줄 수밖에 없었다.
양요섭은 아직 뚜껑이 열리지 않은 판도라의 상자였다. 처음에 나는 그 상자 속에서 뭐가 나오든 상관이 없었다. 그러다가 점점 나는 나와 비슷한 그림자 같은 것이 나와줬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다. 사람 사이를 결속시키는 것은 동질감이니까. 양요섭이 나와 같아서 평생 나와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얼마나 양요섭을 욕망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허기진 내게 다가와 준 양요섭이 미치게 탐스러워서 나의 욕망은 점점 나쁜 쪽으로 흘러갔다. 하루가 멀다 하고 나에게로 거리를 좁혀오는 양요섭을 그대로 방치했던 것이다.
내가 나쁜 연기를 들이마시는 게 싫다고 했다. 나를 그런 식으로 대해 준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일 사람인데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양요섭의 곁에서 나는 가해자 아들도 피해자 아들도 깡패 동생도 아닌 그저 오롯한 이기광이었다. 그래서 익명이 된 듯 편안했다. 내가 그렇게도 취급받아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해서 이젠 밤에 눈을 감는 게 두려워졌다. 영영 뜨지 못할까 봐.
그러다가 벌을 받아버리고 만 것이다. 양요섭 앞에 영영 눈을 감아야 하는 벌.
양요섭에게 피우던 담배를 모두 반납하고 금연을 결심한 날, 나는 아직 열리지 않은 양요섭의 상자 속 내용물을 미리 알아버렸다. 양요섭은 에이 그룹의 숨겨진 장손이었고, 에이 그룹과 사돈지간인 서 의원의 뒤를 봐주고 있는 조직이 내 형이 몸담고 있는 조직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했다. 양요섭의 상자 안에는 나와 비슷하기는커녕 가늠조차 되지 않을 만큼 다른 것이 들어있었다. 나는 죽었다 깨나도 만져보지 못할 번쩍이는 빛. 냉혹한 이질감에 걷잡을 수 없는 고독이 나를 휘감았다. 형은 그 이야기를 하면서 나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그곳에는 종종 나를 꾸며주던 보스의 오른팔 아저씨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은 그 아저씨 보고 보스.라고 불렀다. 오른팔 아저씨가 보스를 치고 그 자리를 빼앗은 것이다.
어쨌든 오른팔 아저씨. 아니, 보스는 나에게 제안 같은 협박을 했다. 평생 자기 곁에 있으라고, 그러기 위해선 먼저 죽어줘야겠다고. 보스의 손에는 나도 모르게 미리 작성된 나의 사망신고서가 펄럭거리고 있었다. 나는 돌아가는 상황을 빠르게 이해했다. 나를 인형처럼 멋대로 코디하길 즐겼던 그는 진짜로 나를 인형으로 만들 속셈이었던 거다. 솔직히 말하면 그 제안이 나쁘지 않았다. 범죄자의 아들이라는 낙인을 꼬리표처럼 달고 다녔던 나에게 죽으라는 보스의 제안은 차라리 달콤하게 들렸으니까. 모든 안 좋은 낙인들을 지우고 모든 것을 리셋할 기회. 모든 것을 지우고 싶었던 내게, 세상에서 죽고 완벽하게 보스의 사람이 되라는 것은 오히려 구원의 동아줄이었다. 그것만 잡으면 이제 나는 그 지긋지긋한 손가락질들과, 표식과, 모든 더러운 것들로부터 해방이었다. 그것을 수락하면 지겨웠던 형 또한 평생 남남이 되어주겠다고 했다.
그 황금 같은 제안 앞에서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이곳에 오기 전 왜 형이 양요섭의 정체를 알려줬는지 명징하게 깨달아버리고 말았다. 형은 내가 이렇게 망설일 것을 예상하고 나에게 쐐기를 박은 것이다. 양요섭은 너와 질적으로 다른 사람이니 헛꿈 꾸지 말라고. 이곳이 니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헛된 망상 속에 빠져있었나. 소각장 일을 그만두고 담배를 끊기로 결심하면서 나는 어쩌면 나도 깨끗해질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에 사로잡히고 있었던 것이다. 양요섭은 그의 곁에서라면 뭐든 다 될 것 같이, 나를 그토록 허황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불길처럼 치솟던 내 욕망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진압되고 있었다.
이제 꿈에서 깰 시간이었다. 나는 담담하게 보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화재사고가 조작됐고, 나는 세상에서 완벽하게 지워졌다. 그리고 나는 보스의 인형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양요섭의 상자가 열렸다. 세상 가장 양지바른 곳으로 그를 이끌어줄 번쩍이는 황금들이 가득 찬. 그것들은 앞으로 양요섭의 인생을 풍족하게 밝혀줄 것이다. 한때는 같은 꿈을 꾸며 함께 허황됐던 우리는 이제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태양을 향해 점점 높은 곳으로, 나는 태양이 닿지 않는 그림자 속 가장 낮은 심연으로. 그렇게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닿지 않을 태양을 하염없이 올려다보며 너를 그리워하는 것. 그것이 잠시나마 너를 욕심냈던 내게 주어진 속죄일 것이다.
진심으로 나는 그것을 달게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너는 그 좋은 곳을 올라가지 못하고 여전히 불나방처럼 나를 쫓고 있는 것이다. 내 불길은 이미 꺼져 나는 이제 유령이 되었음에도 너의 발길은 거둬지지 못하고 계속해서 나에게로 뛰어들고 있었다. 너는 점점 망가져가고 있었다. 내내 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그림자처럼 숨어 너의 붕괴를 지켜보면서 나는 그제서야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명징하게 깨달아버리고 말았다. 끝까지 마음을 열어주지 말았어야 했다. 그것도 못할 거면 너를 내 아지트로 끌어들이지 말았어야 했다. 그것도 못할 거면 내게 입 맞춰 오는 너의 뺨이라도 쳤어야 했다. 가진 것들이 더럽고 음습한 것들밖에 없어서 네게 아무것도 줄 것이 없었으면, 네가 주는 것들을 아무것도 받지 말았어야 했다. 나의 죄는 뻔뻔함이었다. 내가 너를 망가뜨린 것이다.
보고 싶고 그리워하는 마음은 사치였다. 보스의 곁에서 나는 매일 밤 울며 잠들었다. 네 상자 속에서 나올 이질감을 두려워했던 것. 자발적으로 내 그림자 속으로 들어와준 네가 다시 떠나갈까 봐 사실은 초조했던 것. 너는 항상 너 자신보다 날 더 사랑해줬는데, 그걸 받아먹으면서 나는 단 한 번도 나보다 널 더 사랑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 그 모든 미안함과 고마움을 너에게 말하지 못하고 멋대로 죽어버린 것. 그래서 네 인생을 평생 끝나지 않을 고통 속에 미완으로 박제시켜 놓은 것. 그것들을 참회하고 또 참회하면서.
애타게 내 이름을 부르는 네 목소리가 들렸다. 그 음성을 따라간 내 발걸음이 멈춘 곳은 너와 첫 키스를 나눴던 굴다리 밑이었다. 눈물을 가득 매달고 너는 또 내게로 뛰어들고 있었다. 나는 불과 몇 분 전의 참회를 망각하고 다시 뻔뻔해지고 있었다. 온통 그림자로 뒤덮인 암흑 속엔 너와 나 둘뿐이었고 우리는 서로를 깊게 끌어안고 사정없이 입을 맞췄다. 짧은 꿈이 깨어지고 나면 다시 또 기약 없는 그리움의 길이 아득하게 이어질 테니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