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ck
- 2018년 9월 9일
- 11분 분량
요섭 X 기광
w.율린
“저녁이 되면 의무감으로 전화를 하고, 관심도 없는 서로의 일과를 묻곤 하지. 가끔씩은 사랑한단 말로 서로에게 위로하겠지만, 그런 것도 예전에 가졌던 두근거림은 아니야.”
굉장히 유명한 노래다. O15B의 아주 오래된 연인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태어나서 적어도 한 번은 들어봤을 것이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이 노래의 뒷부분에는 이런 노랫말이 나온다.
“자연스레 이별할 기회를 찾으려 할 때도 있지.”
그래. 이게 바로 우리였다. 이 노래 가사처럼 아주 오래된 연인이었던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별을 맞이했고, 이상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게 서로가 없는 일상에 적응했다.
# 나중에 두고 봐
사진작가인 요섭의 일상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굉장히 바쁠 때와 굉장히 한가할 때. 몇 주 전에 있었던 개인 사진전 <白>을 성황리에 마친 요섭은, 거의 반 년 만에 찾아온 휴식기를 즐기는 중이었다. 이미 점심을 먹고도 한참이 지났을 시간에 느지막이 일어난 요섭은 부스스한 뒷머리를 긁적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밥이나 직접 해 먹을까 싶었다. 터덜터덜 부엌으로 향한 요섭이 곧바로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당근, 양파, 애호박, 먹다 남은 스팸, 저기 깊숙한 곳에 있는 신 김치까지. 간단하게 김치볶음밥 정도는 해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냉장고 안에서 주섬주섬 재료를 꺼낸 요섭이 서랍장에서 넓은 프라이팬 하나를 꺼내 인덕션 위에 올려놓았다. 인덕션에 불을 올리려던 요섭이 그제야 부엌 아일랜드에 그대로 남아있는 야채들을 기억해냈다. 익숙하게 도마와 칼을 찾은 요섭은 몇 없는 재료들을 하나씩 썰기 시작했다. 소리 하나 없이 적막한 집 안에 탁탁탁- 칼소리가 울려 퍼졌다.
본격적으로 야채를 볶기 전 프라이팬을 한번 닦을 요량이었다. 원을 그리며 올리브유를 두른 요섭이 키친타월을 찾았다. 항상 같은 수납장에 키친타월을 보관하곤 했었는데, 서랍장 문을 연 요섭을 반기는 것은 텅 빈 심뿐이었다. 그래도 집안 어딘가에 여분이 있을 것만 같아서, 요섭은 잘 열지 않는 싱크대 쪽 밑에 있는 서랍장 문을 열었다. 읏챠-하는 소리와 함께 무릎을 굽혀 쪼그려 앉은 요섭이 서랍장 안으로 고개를 넣어 키친타월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 요섭의 손에 걸린 것이 있었으니, 바로 중간 크기의 락앤락 용기였다. 마침 불투명해서 외관으로는 내용물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요섭이 하나씩 잠금장치를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뚜껑을 제거한 중간 크기의 락앤락 용기 안에는 다양한 커피숍에서 하나씩 모아온 컵홀더가 가득했다.
- 야, 이걸 왜 모아. 이거 나중에 다 쓰레기라니까?
- 어휴, 너는 이래가지고 어떻게 작가하냐? 이런 일상적인 물건에서 영감이 떠오르는 거야 바보야.
- 뭐?
- 나중에 너 분명히 이거 보면서 사진 찍는다.
-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에 그랬다면 이기광 협박에 못 이겨서 찍은 거겠지.
- 이게, 너 진짜 나중에 두고 봐!
요섭이 새까맣게 잊고 있던 락앤락 용기 안에는 이기광이 모아놓은 컵홀더로 가득했다. 나이는 찼지만 쓴 것을 좋아하지 않아 커피에는 취미가 없는 요섭 대신, 매일 같이 초과근무에 시달리던 기광이 차곡차곡 모아놓은 컵홀더.
# 그래야 더 경제적이야.
슬슬 다시 사진전은 준비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 같이 일하는 자신의 조수 동운에게서 지난밤 받은 문자가 이 사실을 상기시켜주었다. [작가님........ 저희 내일부터 출근이죠.........?] 목소리가 그대로 들리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요섭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평소에는 ‘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동운은, 꼭 이럴 때만 ‘작가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ㅇㅇ 솔직히 보름이면 많이 쉬었다 동운아.] 라는 요섭의 답장에, [네, 내일 봬요 형 ㅠ.ㅠ] 이라는 귀여운 답장이 돌아왔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요섭 역시 출근이 반가운 건 아니었다. 사진 찍는 건 즐거운 일이지만, 다음 전시회의 컨셉을 잡고, 계획을 세우고, 일정을 조율하는 것은 복잡한 문제였으니까.
다음 날 아침, 예정보다 일찍 일어난 요섭이 작업실 근처에 있는 카페로 발걸음을 돌렸다. 간만의 출근으로 지쳐있을 동운과 자기 자신을 위해 음료라도 사갈 생각이었다. <HIGH-LIGHT> 익숙한 간판을 확인한 요섭이 망설임 없이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요섭의 작업실 바로 앞에 있는 작은 카페였다. 브랜드가 있는 체인점이 아니라 개인 바리스타가 차린, 전국에 하나밖에 없는 가게였다. 커피 맛은 둘째치고, 바리스타가 매우 잘생긴 바람에 카페에는 항상 손님이 많았다. 창문을 타고 기다란 종이 밧줄에 손님들 음료 쿠폰을 하나하나 작은 집게로 집어놓은 인테리어가 인상적인 카페였다.
“어, 작가님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두준씨도 잘 지내셨죠?”
익숙하게 인사를 한 요섭이 고개를 들어 메뉴판을 바라봤다. 모름지기 음료는 달아야 한다며 커피마저 단 것을 좋아하는 동운을 위해 캐러멜 마키아토, 커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자신을 위해서는 녹차라테. 음료 주문을 마친 요섭이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두준에게 내밀었다. 계산을 마친 두준이 요섭에게 카드를 돌려주며 밧줄에 매달려 있는 음료 쿠폰을 찾기 시작했다. 단골손님이라는 것을 인증이라도 하듯 금세 요섭의 쿠폰을 발견한 두준이 쿠폰을 빼내어 도장을 찍었다. 그러는 동안 핸드폰을 보고 있던 요섭이, 이어지는 두준의 말에 행동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저기, 10개 다 채우셨는데, 서비스로 한 잔 더 드릴까요?”
“네?”
“받아서 애인분 드리세요. 아메리카노 좋아하셨잖아요.”
두준의 말에, 요섭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천천히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갑자기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무런 말 없이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는 모습에 두준이 손에 들고 있던 쿠폰을 요섭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맨 위에 검은색 마카로 굵게 써져있는 이름은 ‘이기광’이었다.
- 아니요, 그냥 기광이 쿠폰에 두 개 다 찍어주세요.
- 맞아요, 그냥 제 것에 도장 찍어주세요. 그래야 더 경제적이야.
- 넌 도대체 커피를 얼마나 마셨길래 벌써 8번을 채우냐?
- 그만큼 너 보러 자주 왔다는 거거든!
칼퇴근을 한 날이면 항상 요섭의 작업실을 찾아오던 기광의 두 손에는 항상 테이크아웃 커피가 들려있었다. 그때마다 항상 카페 <HIGH-LIGHT>에서 커피를 사 가던 기광이 만들어 놓은 음료 쿠폰이었다. 둘이 각자 쿠폰을 모으는 것보다는 한 명의 쿠폰에 같이 모으는 게 더 경제적이라는 생각에 둘이 같이 사용하던 쿠폰이기도 했다. ‘아, 아직 두준씨는 모르겠구나.’ 상황 파악을 마친 요섭이 가장 먼저 한 생각이었다.
# 정신 팔고 다니지?
사진작가라는 직업의 특성상 요섭은 서류 가방을 들고 다니는 일이 드물었다. 대부분 카메라와 렌즈로 꽉 차 있는 카메라 가방을 들고 다녔으니까. 그리고 오늘은, 그 드문 날 중 하루였다. 다음 촬영 컨셉의 영감을 얻기 위해 무작정 밖으로 나가 돌아다닐 생각이었다. 서류 가방에 작은 노트북을 챙긴 요섭이, 소형 카메라 하나만 챙긴 채 집을 나섰다. 시작은 집 앞이었다. 서울 도심이 새로워 봤자 얼마나 새롭겠느냐마는, 원래 영감은 일상에서 떠오르는 것이라고 했다. 차와 사람으로 북적거리는 길을 걷길 벌써 3시간째였다. 슬슬 허기도 지고 다리도 아파왔다. 잠시 쉬어갈 타이밍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요섭이 근처에 있던 카페에 들어갔다. 간단하게 빵과 음료를 주문하고는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낸 요섭이 익숙하게 카메라와 노트북을 연결했다. 3시간 동안 돌아다니며 찍은 사진도 점검하고, 인터넷으로 가볼 만한 여행지를 검색해볼 심산이었다.
다섯 번째로 주문한 음료를 다 먹어갈 때 즈음이었다. 어느새 훌쩍 지나버린 시간을 확인한 요섭이 슬슬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이만하면 됐다 싶었다. 요섭이 음료 잔으로 가득한 쟁반을 카운터에 반납한 후 카페를 나섰다. 주황빛으로 노을이 번진 하늘과, 높게 솟아있는 서울의 빌딩이 나름 볼만한 장면을 만들어냈다. 본능적으로 사진기를 꺼낸 요섭이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잠시 ‘조금 더 좋은 카메라를 가지고 나올걸’이라는 후회가 들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계속했다.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저기, 실례합니다.”
무작정 가게 안으로 들어간 요섭이 가게 안을 두리번거리며 사람을 찾았다. 어두워지는 하늘에 걸음을 빨리하던 요섭이 새로 생긴 것처럼 보이는 조그만 가죽 공방을 보고 홀린 듯 그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가죽으로 만들어진 공예품이 예쁜 것도 예쁜 것이었지만 공방 안 인테리어가 아주 아름답다고, 요섭은 생각했다. 요섭이 가게 안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사이, 한 여성이 작업실에 나와 요섭을 반겼다. 웃으며 인사를 나눈 요섭이 급하게 가방에서 명함을 찾았다.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터라, 미처 명함을 준비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후회가 들었다. 결국, 요섭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물론 자신에 대한 설명과 함께. 자신은 사진작가인데, 이 공방이 너무 예뻐서 이곳을 자신의 카메라에 담고 싶다고. 이곳을 촬영해도 괜찮겠냐고.
“제가 실은 이 공방 주인이 아니에요.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워서 잠깐 봐주고 있는 거라.”
“아….”
“음, 제가 이따가 주인 오면 여쭤보고 연락드릴게요. 번호 하나만 적어주시겠어요.”
사람 좋은 미소를 띤 여성이 계산대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작은 조각 종이 하나를 내밀며 말했다. 긍정적인 반응에, 요섭 역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섭에게 종이를 건넨 여성은 계산대 주변에서 볼펜을 찾았다. 조금 시간이 걸리는 게, 아무래도 볼펜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는 모양이었다. 여성이 잠시만 기다리라는 소리와 함께 작업실 안으로 들어갔다. 요섭 역시 자신의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들고 나온 기억은 없지만 혹시나 싶었다. 보통 가방 안에 볼펜 하나 정도는 들고 다니니까. 수납공간이 단순한 가방을 들고 나온 탓에 오래 확인할 것도 없었지만, 요섭은 괜한 오기가 생겨 가방 안을 샅샅이 뒤졌다. 작업실 안에서 먼저 볼펜을 찾은 여성이 작업실 밖으로 나옴과 동시에, 요섭의 손끝에도 볼펜 하나가 스쳤다. 없을 걸 알면서도 찾은 거였는데, 웬 볼펜인가 싶은 마음에 가방 안에서 볼펜을 꺼냈다. 그리고 그 볼펜 옆면에 적힌 ‘아현 고등학교’라는 글씨를 확인하는 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 뭐 해? 가방에 뭐 넣었어?
- 나 펜 하나만 넣어줘. 아무 생각 없이 손에 들고 나왔던 말이야.
- 하여튼 이기광. 정신 팔고 다니지?
- 네가 갑자기 불러내서 그런 거거든!
유명 사진작가의 전시회 겸 세미나에 초청을 받아 프라하로 출장을 다녀온 직후였다. 생각보다 일정이 일찍 끝나 예정보다 하루빨리 귀국을 한 날이었다. 기광에게 깜짝 이벤트를 해줄 생각으로, 요섭은 일찍 온다는 말 한마디 없이 불쑥 학교 앞으로 기광을 찾아왔더랬다. “농구 코트 옆에 수돗가. 우리 고등학교 때 맨날 만났던 거기로 와, 지금.” 그날도 어김없이 학교에 남아 업무를 보고 있던 기광이 요섭의 전화에 화들짝 놀라 전화를 받았던 상태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손에는 핸드폰,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채점 중이던 빨간펜을 든 상태 그대로.
굳이 계산해보자면 15년 전이었다. 아현 고등학교 2학년 8반. 그곳에서 우리는 15년 전 처음 만났고, 친구로 7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보냈다. 그리고 나머지 8년은 연인이었다. 너무 오래 알고 지낸 인연이었고, 그렇기에 이런 숫자에는 익숙하지가 않았다. 가끔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우리가 정말 오래된 사이이기는 하구나’라며 자각하는 정도였으니까. 항상 옆에 있었던 사람이라서 그 사람이 없는 일상이란 되려 낯선 것이었다. 긴 권태기에 서로 연락을 잘 하지 않을 때도, 서로 일이 바빠 일주일에 한 번 겨우 얼굴을 볼 때도. 함께 있지는 않지만 그 사람은 항상 내 옆에 있다고 생각했었다. 너무 가까운 사이라 서로의 소중함을 몰랐고, 너무 익숙한 사이라 서로의 의미를 몰랐다.
애석하게도, 헤어진 다음에야 이런 것들이 하나둘 머릿속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15년이라는 긴 생활 동안, 그 사람은 이미 내 일상 속에 들어와 있었다. 내 일상은 그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 사람이 없는 모든 일상이 나에게는 너무 잔인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너는 곁에 없었다.
# 아 더러워!
올해 들어 가장 운이 좋았던 순간을 고르라면, 기광은 망설임 없이 ‘담임을 맡지 않은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햇수로 6년 전, 첫 발령을 시작으로 담임을 맡지 않은 것은 올해가 처음이었다. 그래도 첫 발령은 중학교였던 덕에 담임치고 업무가 많았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 업무는 많았지만 할만했다. 견딜만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2년 전 아현고로 학교를 옮기게 된 후에는 말이 달라졌다. 난생처음 맡아봤던 고3 담임이란 자리는 기광에게 많은 것을 남겼다. 모교에서 후배를 가르치게 되었다는 설렘, 고3 아이들과의 추억, 가장 큰 보람, 그리고 매일같이 반복되었던 초과근무와 수면 부족으로 인한 스트레스. 아현 고등학교 3학년 2반 담임 이기광에서 수학교사 이기광의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처음으로 학년 교무실이 아닌 중앙 교무실에 자리를 잡고 앉은 기광이었다. 벌써 6년 차 교사이긴 하지만 아직은 신참이었다. 교감선생님 자리 바로 앞에 앉은 주제에, 그것도 이제 막 봄방학을 마치고 새로운 시작이라 불리는 3월 학기 초에, 교무실에 들어와 실실 웃는 기광을 보고 많은 동료 교사들이 혀를 내둘렀더란다.
시간은 금세 흘렀다. 마냥 좋기만 했던 그 자리가 어느 순간 교감이 너무 가까이 있어서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이었다. 기광은 교무실에 앉아서 다음 수업에 쓰일 수업자료를 만들고 있었다. 같은 시간에 수업이 비어 함께 자리에 남아있던 맞은편 윤리 선생님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열심히 자판을 치고 있었다. 순간 조심스럽게 교무실 문이 열렸다. 그 소리에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바라본 기광이 금세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어 준형쌤? 여기 어쩐 일이야?”
“왜긴, 쌤 보러 왔지.”
작년, 그러니까 기광이 3학년 2반 담임이었을 때 옆 반인 3반을 맡았던 용준형이었다. 기광보다는 일 년 먼저 이 학교에 부임한 국어 선생님이었는데, 나이가 같아 금방 친해졌다. 일 년 내내 같은 교무실 바로 옆자리에서 근무했던 것이 큰 역할을 했다. 물론 고 3 담임들 간 공유하는 묘한 동질감이 이 둘을 더 끈끈하게 묶었지만.
“이거 기광쌤 것 맞지?”
라며 준형이 기광에게 내민 것은 조그만 보조배터리였다. 처음에는 영문을 알지 못해 어리둥절해 있던 기광을 보고 준형이 덧붙였다.
“작년 체육대회 때 나한테 빌려주고, 서로 까먹은 것 같아.”
그제야 기억이 난다는 듯 보조배터리를 받아든 기광이 허허-하고 허탈하게 웃었다. 빌려줘 놓고 까먹은 자신이나, 그걸 이제 발견해 돌려주는 준형이나 서로 참 웃기다고 생각했다. “내가 빵빵하게 충전시켜 놨어”라는 말에 기광이 피식 웃었다. 그 말을 끝으로 준형은 제 교무실로 돌아갔다. 2학년이긴 하지만, 올해도 담임을 맡은 준형은 여전히 바쁜 모양이었다. 준형이 가고, 홀로 남은 기광은 키보드 옆에 얌전히 누워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안 그래도 어젯밤 충전을 깜빡하는 바람에 배터리가 간당간당했었는데, 운이 좋다 싶었다. 거의 1년 만에 돌려받은 보조배터리를 집은 기광이 이리저리 배터리를 살펴보았다. 연결 잭을 뽑아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배터리를 뒤집은 순간, 기광은 한가운데 붙어있는 노란색 둘리 밴드를 발견했다. 흔히 소아과에서 아이들이 주사를 맞고 난 자리에 붙여주는 동그랗고 노란 둘리 밴드.
- 아 양요섭! 더러워, 이걸 왜 여기에 붙여!
- 왜? 얼마나 귀엽냐? 둘리가 너 보고 인사한다.
- 아씨, 진짜. 이거 뗄꺼야
- 봐봐, 누가 봐도 이건 이기광 거라는 게 티가 나잖아. 응? 얼마나 좋아.
열이 펄펄 끓는 날이었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 요섭을 보며 기광이 더 놀랄 지경이었다. 그냥 집에서 쉬라고 진심으로 말리는 기광에도 요섭은 꿋꿋이 약속 장소에 나왔다. 참으로 오랜만에 하는 데이트를 자기 때문에 망칠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날 기광을 만나기 전 내과에 들렀던 요섭은 해열 주사를 맞고도 열이 안 떨어져 링거를 맞아야 했다. 손등에 미세하게 남아있는 링거 자국을 행여 기광이 발견하면 속상해할 것 같아서, 요섭은 간호사에게 밴드를 부탁했다. 그렇게 요섭은 손등에 노란 둘리 밴드를 붙인 채 약속 장소에 나왔다. 요섭의 상태를 확인한 기광은 식당에 들어오자마자 인상을 썼다. 들고 있던 핸드폰과 함께 충전 중이던 보조배터리를 식당 테이블에 내려놓은 기광의 손이 곧바로 요섭의 이마로 향했다. 그런 기광의 모습에 되려 환한 웃음을 보이던 요섭이 제 커다란 손으로 기광의 앞머리를 살살 정리했다. “호이!” 그리고 요섭은 꽤나 우스꽝스러운 목소리로 제 손등에 붙어있던 밴드를 기광의 보조배터리에 턱하니 붙였다.
기광이 들고 있던 보조배터리를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빛이 바래 이제는 상아색에 가까워진 노란색 둘리 밴드를 만지작거렸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은 밴드를 보며 기광은 다소 과격하게 제 서랍을 열었다. 서랍 깊숙한 곳에 배터리를 집어넣은 기광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 아니었구나, 싶었다.
# 그건 비밀.
개학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시험 기간이었다. 선생님들은 밀린 진도를 빼느라 바빴고, 시험문제를 내느라 정신이 없었으며, 이따금 물어오는 학생들의 질문을 해결해주느라 더할 나위 없이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연달아 3시간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에 돌아온 기광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출근 후 처음 가지는 휴식이었지만 지금 기광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마우스를 움직여 잠들어 있던 컴퓨터를 깨우니, 하단에 쿨메신저가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메시지를 확인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최대한 빨리 시험문제를 제출해주기 바란다는 학년 부장의 연락이었다. 습관처럼 튀어나오는 한숨을 속으로 삼킨 기광이 가방에서 외장하드를 꺼내 컴퓨터와 연결했다. 만들고 있던 시험지 파일을 열고, 바로 옆에 놓여있던 교과서를 펼쳤다. 교과서를 뒤적이던 기광이 괜찮은 문제를 발견했다. 교과서 구석에 있었던 단순한 계산 문제인데, 유난히 모든 반 학생들이 어려워했던 문제였다. 같은 문제 풀이 방식을 사용하되, 문제 형태만 문장제로 바꾸면 적당하겠다 싶었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기광이 서둘러 시험지 파일에서 문장제 문제를 찾기 시작했다. 어차피 시험지 양식은 작년과 동일할 테니, 작년에 만들었던 시험지에 새 문제를 덮어쓸 생각이었다. 열심히 스크롤을 내리던 기광은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빠르게 문제를 훑던 기광은, 순간적으로 움직이던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작년에 자신이 만든 문제에 등장한 ‘요섭’ 때문에.
- 애들이 양요섭이 누구냐고 물어보더라 오늘.
- 너네 학교 학생들? 걔네가 나를 어떻게 알고?
- 내가 오늘 기말고사 문제에 요섭이가 실수로 달력을 찢어버렸다고 썼거든.
- 그래서 뭐라고 했어?
- 그건 비밀.
- 뭐야, 이기광. 애인이라고 했지 당연히?
- 아니. 그냥 상상 속의 인물이라고 했는데?
- 씨, 이기광!
- 흥분하긴. 뻥이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어.
웬만하면 업무는 학교에서 모두 끝내는 것이 기광이 원칙이라면 원칙이었다. 집에 가져가서 쉽게 끝낼 수 있는 일들도 기광은 굳이 학교에 남아서 작업을 마무리하는 성격이었다. 그런 기광을 누구보다 잘 아는 요섭이, 그날따라 고집을 부렸다. 답지 않게 애교를 부리는 요섭에, 기광은 못 이긴 척 학교에서 나와 요섭의 집에서 남은 시험문제를 만드는 중이었다. 기광의 맞은편에는 간만에 소설을 읽는 요섭이 앉아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덧 마지막 문제였다. 활짝 기지개를 편 기광이 슬쩍 요섭을 바라보았다. 유난히 조용하다 싶더니, 어느새 책을 접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요섭이 보였다. 그 모습에 설핏 웃음을 흘린 기광이 마지막 문장제 문제의 주인공을 요섭으로 결정했더란다. 실수로 달력을 찢어버린 양요섭.
# 진짜 취향하고는.
시험이 끝났다. 시험 직후 바쁘게 진행되었던 채점과 성적 확인을 끝으로 학생들은 다시 모의고사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학생들은 여전히 바쁘지만, 교사들은 이제야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행여 자신이 만든 문제에 오류가 있을까, 학생들 평균이 너무 낮거나 높게 나오지는 않을까 마음을 졸였던 기광 역시 이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하는 정시 퇴근이었다. 5시가 조금 넘은 시간, 집에 도착한 기광은 옷을 갈아입고 비장한 얼굴로 옷장 앞에 섰다. 그리고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옷장 문을 열었다. 이제 여름이 다가오고 있으니, 옷장 정리를 해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옷장을 열자마자 보이는 두꺼운 긴팔 옷들은 이제 벽장 깊숙이 들어갈 시간이 왔다.
분명 아침 출근 시간에 옷장 문을 열면 입을 옷이 없어도 너무 없더니, 막상 정리하려니 옷이 태산같이 많았다. 벌써 옷장 정리를 시작한 지 한 시간이 훌쩍 넘어있었다. 옷장과 큰 서랍에 있던 옷들은 모두 정리를 마친 시점이었다. 이제 정말 끝이 보이고 있었다. 남은 건 침대 아래에 붙어있는 자그마한 서랍 두 개뿐이었으니까. 심기일전이라고, 속으로 마음을 다잡은 기광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서랍의 문을 열었다. 열린 서랍장의 맨 위에는 핑크색과 하늘색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담요가 있었다. 가운데에 도라에몽이 커다랗게 그려져 있는, 털이 복슬복슬한 담요였다. 기광의 기억이 맞다면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는 기광을 위해 요섭이 선물했던 담요였다. 아니, 그 담요가 확실했다. 그 자리에서 기광은, 한참 동안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 하여튼 양요섭. 진짜 취향하고는.
- 아, 내 취향이 아니라 손동운 취향이라니까!
- 뻥치시네. 자기가 좋아서 사 온 거면서.
- 아 손동운 진짜! 줘, 내일 다시 사다 줄게. 내가 직접 가서 고를 거야.
- 야야, 됐어 됐어. 네 취향이 내 취향이지 뭐.
기광은 유난히 병치레가 잦았다. 툭하면 감기, 뭐만 먹었다 하면 위염, 운동은 그렇게 좋아하면서 틈만 나면 몸살에 걸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그날도 그런 줄만 알았다. 요섭과 함께 영화를 보고 들어가는 길, 기광은 유난히 컨디션이 안 좋았다. 병원으로 향하는 요섭의 발걸음을 약국으로 돌린 건 기광이었다. 분명 또 감기몸살일 텐데 뭐, 이게 그 이유였다. 여느 날처럼 종합 감기약을 사서 집으로 돌아온 기광은, 그날 새벽 요섭과 헤어진 지 정확히 6시간 만에 요섭에게 전화를 걸어야 했다. 목소리만으로도 떨림이 느껴졌다. ‘요섭아, 나 아파. 좀 심하게 아픈 것 같아.’ 다 죽어가는 힘없는 목소리에 허겁지겁 달려온 요섭이 기광을 데리고 응급실에 갔을 때, 의사가 기광에게 내린 병명은 저체온증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출근 대신 동운에게 연락을 한 요섭은 동운에게 담요를 부탁했다. 제일 두껍고 제일 부드럽고 제일 따뜻한 담요. 그리고 다음 날, 동운의 취향을 확인한 요섭은 깊은 한숨을 쉬어야 했다.
이럴 거면 너를 잡았을 텐데. 그랬으면 이렇게 죽을 만큼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 너를 잊으려고, 네가 없는 내 삶에 적응하려 노력하는 내 일상에 네가 나타날 때마다 이 생각을 한다. 또, 후회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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