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는 날엔
- 2018년 9월 9일
- 5분 분량
시끄러운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오늘도 방안은 아직 밤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온통 깜깜했고 빗방울은 시끄럽게 창문을 두드렸다. 이런 날은 아침부터 기운이 나지 않았다. 씻고 밥을 먹고 옷을 입고, 평소와 똑같지만 어딘가 쓸쓸한 느낌. 학교에 도착했음에도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거세졌다. 턱을 괴고 무심히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보다가 세찬 빗방울에 힘없이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보다가, 그러다가 빈 옆자리를 본다.
“결석, 이기광.”
비가 내리기 시작한 지 17일째, 이기광이 학교에 오지 않은 지도 17일째였다.
비
가
오
는
날
엔
w.잣
왜 학교에 오지 않는 걸까? 처음엔 이기광의 결석을 두고 무성한 소문들이 있었다. 단순히 감기에 걸린 것에서 시작했지만 결석일수가 점점 늘어나자 사고가 났다느니 반대로 사고를 쳤다느니 갑자기 정학을 당했다느니 가출을 했다느니, 온갖 말들이 오고 갔지만 주인공이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소문들도 점차 가라앉았다. 누군가가 나에게 아는 것 없냐고 물어볼 때면 나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아는 게 전혀 없기도 했을뿐더러 이기광과 친한 사이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기광과는 2개월째 옆자리지만 대화를 많이 나눈 것도 아니었고 딱히 친하게 지낸 적이 없었다. 나는 이기광을 몰랐다.
“여전히 안 오네.”
“어?”
“이기광 말이야.”
“그러게…”
이기광의 결석에 흥미가 있는 녀석들이 종종 있었는데, 양요섭도 그중 한 명이었다. 내가 뭔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이기광이 결석하는 날이면 내 자리로 와 넌지시 그에 대해 묻곤 했다. 그러니까 이 짓도 17일째란 거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수없이 얘기했지만 양요섭은 도무지 믿지 않는 눈치였다.
“비는 언제쯤 그치려나.”
“그러게.”
나는 이기광에 대해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결석 일이 길어질수록 이상하게 걱정이 됐다. 걱정이랄까,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하루 종일 옆자리에서 잠만 자는 애가 없어져서 허전한 걸까? 혹시 정말로 사고가 나서 입원했다거나 심각한 병에 걸린 건 아닐까? 이상한 상상을 하며 빈자리를 내려다보다가 인상을 썼다. 내가 왜 이기광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왠지 신경이 쓰였다. 비가 그치면… 올까?
“윤두준, 담임이 불러.”
선생님의 부름에 어기적거리며 일어났다. 아직도 축축하게 젖어있는 양말 때문에 걸을 때마다 발이 찝찝했다. 내일부터는 양말을 두 개씩 들고 다닐까. 아빠한테 태워달라고 할까. 실없는 생각을 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교무실에 도착했을 때 선생님은 짐짓 심각한 얼굴이었다. 나 무슨 잘못이라도 했던가. 그제서야 최근의 학교생활을 반성하고 있는데 선생님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생각도 못 한 말이었다.
“기광이네 집에 다녀와라.”
“네? 제가요?”
“선생님이 가려고 했는데, 연락도 안 되고 무슨 일인지 모르니 섣불리 가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래.”
“제가 가는 건 되고요?”
“너는 친구잖아. 주소는 여기 적어놨으니까, 받아. 가까워.”
떨떠름한 표정으로 쪽지를 받아들었다. H 빌라 지하 1층…… 아무래도 내키지가 않았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데 나보고 가라는 건가? 이런 건 친한 녀석한테 시키면 되지 왜 나를… 자리를 뜨지 않고 인상만 쓰고 있는 나를 보신 선생님은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두준아, 부탁한다. 수학 숙제 면제해줄게.”
교무실에서 나오자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양요섭이 질문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나를 왜 불렀는지, 혹시 이기광과 관련된 일은 아닌지 무섭게 몰아붙이는데 마음 같아선 그렇게 좋으면 네가 가라고 하고 싶었지만 말하지 못했다. 괜히 얘기하면 더 귀찮아지기만 하겠지. 손을 휘휘 내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둘러대고 자리로 돌아왔다. H 빌라… 저번 주에 살인사건이 일어난 곳이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교실을 나섰다. 비라도 그쳤으면 그나마 가벼운 마음으로 갈 텐데 여전히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양말을 벗을까 하다가 그냥 집에 가서 빨자는 생각으로 슬리퍼를 신고 나왔다. 우산을 펴기 싫었다. H 빌라면 걸어서 5분밖에 안 걸리는 곳이었지만 그래도 가고 싶지 않았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내 팔자야.
“어디 가? 그쪽 아니잖아.”
“어, 나, 잠깐 친구네 들러야 해서.”
“친구? 친구 누구? 이기광?”
“걔가 친구냐. 먼저 가라.”
참 집요한 양요섭을 보내고 나도 빗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산이 뚫릴 것 같은 강한 빗줄기에 몸을 웅크리고 양손으로 우산을 꽉 쥐었다. 잘못 잡으면 날아간다 생각하고 신중히 걸음을 옮겼다. 빗소리가 너무 커서 다른 소리는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다니 대체 무슨 일일까. 이것저것 투덜대다 보니 어느새 이기광의 집에 도착했다. 뭐라고 하지. 안녕? 너무 어색한데. 걱정했어? 오글거리잖아. 건물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훅 끼치는 냉기에 몸을 떨었다. 우산을 탈탈 털어 접자 약하지만 분명히 나는 피 냄새… 잘못 맡은 거겠지. 애써 웃고 계단을 내려갔다. 얼른 인사만 하고 가자. 심호흡을 두 번 하고 문을 두드리려는데 손을 갖다 대자 느릿하게 문이 열렸다. 문 닫는 걸 깜빡했나?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현관으로 들어갔다.
“저기……”
현관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주변이 번쩍거렸고 곧바로 천둥이 쳤다. 빗소리가 정말 컸다. 현관은 비 때문인지 물이 흥건해 찰박거리는 소리가 났다. 집은 작은 것 같았는데 불이 다 꺼져있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 윤두준인데, 기, 기광아 집에 있어? 불이 꺼져있어서 아무것도 안 보이네… 아, 그게 선생님이 가보라고 해서… 어, 집에 없나? 하하… 하긴 위험할 테니 다른 데로 갔으려나. 피 냄새가 이렇게 많이 나는데……”
……어? 피 냄새…? 갑자기 섬뜩한 기분이 들어 문고리를 잡으려고 뒤를 돌자 동시에 문이 닫혔다. 무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시 주변이 잠깐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 하늘이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천둥이 쳤고 나는 조용히 침을 삼켰다. 현관에 고여있는 물이, 분명 붉은색이었다.
“기, 기광…”
“조용히 해.”
“……”
“뒤 돌지 말고, 그대로 있어. 누가 보냈어?”
“서, 선생님이, 걱정되니까 가보라고…”
“너. 양요섭이랑 있었어?”
“어어,”
“더러운 냄새가 나. 다행이네, 너, 한테는.”
“…어?”
“오늘은 보내줄 테니까 가. 그리고… 다신, 오지 마. 다음은, 돌아가지 못할 거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근데 이상하게 이기광의 목소리가 위태롭게 들려서 문고리를 돌릴 수 없었다. 그냥 이 문을 열고 나가면 되는 건데 무언가가 자꾸 마음에 걸려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나가면 끝인데…
“…너, 어디 아파?”
“뭐?”
“목소리가 이상한데…”
“…잔말 말고 가라.”
문이 열리고 등이 떠밀리는 느낌에 튕겨 나오듯 이기광의 집에서 나왔다. 뭐지? 뭐지? 방금 일은… 뭐였지? 이기광은 대체…… 정신없이 빗속을 걷다 보니 어느새 집에 도착해있었다. 꿈을 꾼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기분이 이상했다. 현실감이 전혀 없었다. 꿈이었으면 좋았겠지만 꿈이 아니란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지 양말 바닥이 붉게 물들어있었다.
알람이 울리지 않았다. 분명 씻자마자 쓰러지듯 잠들었지만 피곤함은 가시지 않았다. 벌써 등교 시간을 한참 넘겨버린 시간이었다. 지각인가… 대충 교복만 입고 집을 나섰다.
오늘도 양요섭이 귀찮게 굴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조용했다. 내 쪽을 빤히 쳐다보는 것 같아서 나도 쳐다보면 금방 눈을 피해버렸다. 대체 뭐지. 먼저 말을 걸어달라는 건가? 평소 같았으면 말을 걸며 장난을 쳤겠지만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짧은 대화조차도 귀찮았다.
“윤두준, 교무실로 오래.”
담임 선생님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양요섭이 내 어깨를 덥석 잡았다.
“너, 어제…”
“어제? 아, 늦게 잤더니 피곤해 죽겠다. 나 담임이 불러서 갔다 올게.”
양요섭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교무실로 갔다. 양요섭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기광과 관련된 질문은 더 이상 사절이었다. 이젠 내 쪽에서도 난감해졌기 때문이었다. 선생님한테는 뭐라고 하지. 분명 이기광 얘기일 텐데.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 두준아. 이젠 지각까지 하고 배짱 좋다?”
“알람이 안 울려서…”
“오늘만 특별히 봐준다. 그 대신 수학 숙제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지각했잖아. 아무튼, 어제 갔다 왔어?”
비가 많이도 내리는구나. 태풍이 온다고 했나? 그런 말 없었는데. 그냥 장마인가. 장마가 원래 이렇게 길었던가. 장마는 언제 그치지? 여름이 끝나야 그치는 건가……
“……아니요.”
아, 양말 가져오는 거 깜빡했다.
부랴부랴 수학 숙제를 했지만 수학 시간 내내 엎어져서 자기만 했다. 사실 그전부터 쭉 엎드려 자고 있었다. 잠에서 깰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나를 잠 속으로 계속 끌어당기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을 뜨려고 해도 떠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죽은 듯이 자다가 겨우 눈을 떴을 땐 하교 시간이었다. 가방을 대충 둘러메고 우산을 챙겼다. 이젠 양말이 젖든지 말든지 아무 상관없었다. 비가 참 징하게도 왔다. 분명 한여름의 낮인데 온통 어두웠다. 비가 그치면 세상이 다시 밝아질 수 있을까 하는 걱정까지 들 정도였다. 해가 아예 사라져버린 건 아닐까. 우산을 펴고 발걸음을 떼려는데 양요섭이 나를 불렀다.
“야, 윤두준.”
“어? 왜?”
“…조심하라고.”
“뭘?”
“비, 많이 오잖아.”
갑자기 무슨 얘기람. 그래, 너도 조심해라. 인사를 하고 빗속으로 들어갔다. 분명 빗소리는 충분히 시끄러웠지만 동시에 적막한 느낌도 들었다. 빗속에서는 누구나 혼자인데, 그게 당연한 건데, 나는 이상하게도 왠지 내버려 둘 수 없는 느낌이 들어서……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이상했다. 이기광과 같이 있으면 항상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쉽게 정의할 수 없는 감정들. 나는 지금 나도 모르는 감정들에 휩쓸리고 있었고 나도 그걸 알고 있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계단을 하나씩 내려갈 때마다 반대로 마음이 가벼워졌다. 비에 젖은 우산을 내려놓고 닫혀있지 않은 문을 살며시 밀었다.
그 언젠가 했던 설문조사의 어느 문항.
끝이 어떻게 될지 알고 있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할 것이다.
YES.
문이 열리자 새까만 어둠이 나를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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