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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밤이야

  • 2018년 9월 9일
  • 8분 분량




w.더블비



“야. 일어나.”


기광은 옆자리의 여자애가 어깨를 흔드는 바람에 겨우 잠에서 깼다. 쉬는 시간에 잠깐 눈을 붙였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종례시간이었다. 몇 시간을 잔 건지 가늠도 안 된다. 무심코 손바닥으로 뒤통수를 쓸었다가 저도 모르게 움찔 놀랐다. 아야. 작게 중얼거리는 동안 간밤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뭔가에 세게 얻어맞는 바람에 뒤통수가 조금 찢어졌다. 그땐 별로 통증이 없어 다친 지도 몰랐는데 지금은 좀 아프다. 기광은 무거운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기말고사 얼마 안 남았으니까 준비 잘하고, 닥쳐서 하려고 하지 말고 평소에 좀 잘해두고, 어? 다들 알았지?”


담임의 말소리는 자장가 같다. 기광은 잠이 쉽게 깨지 않아 멍한 머리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다른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 눈이 마주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양요섭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동그란 안경알 너머 날카로운 눈매가 속을 꿰뚫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뭘 봐.’


귀찮다는 얼굴을 가장하고 중얼거렸지만, 양요섭은 태연했다. 기광은 갑작스럽게 얽힌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 직선으로 마주친 눈에서 기시감이 들었다. 사람들 앞에선 대체로 살갑게 굴어도 간혹 서늘하게 가라앉는 표정을 기광은 알고 있었다. 양요섭은 교실에서 종종 그런 식으로 기광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지난밤에도.


이유 없는 눈싸움을 먼저 그만둔 건 기광이었다.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지만 가느다랗게 당겨지는 시선은 여전히 한쪽 뺨에 머물러 있었다. 기광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가방을 집어 들었다. 잊고 있던 상처가 다시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어제 양요섭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쑥 나타났다. 기광이 마음대로 학교를 빠진 게 처음도 아닌데 무려 집 앞까지 찾아왔던 것이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느라 숨을 몰아쉬고 있던 기광은 요섭을 발견하고 당황으로 얼굴이 굳었다.


- 뭐야?


낮은 담벼락에 기대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요섭이 고개를 들었다.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한 얼굴이었다.


- 담임이 가보라고 해서.


거짓말. 기광은 미심쩍은 눈으로 양요섭을 쏘아보았다. 담임은 기광이 밥 먹듯이 지각을 하고 무단으로 결석을 해도 별 관심이 없었다. 애초에 선생들이 관심을 가지는 부류는 따로 있었다. 예를 들어 양요섭 같은 부류. 아무리 반장이라고 해도 교실에 있으나 마나 한, 차라리 없는 편이 나은 결석생을 굳이 양요섭에게 찾아가 보라고 시켰을 리가 없었다. 양요섭이 먼저 가겠다고 해도 그 시간에 공부나 하라며 말렸을 것이 뻔하다. 니가 신경 쓸 일 아니다. 담임의 딱딱한 말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 연락망에 있는 번호는 없는 번호라고 하길래.

-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고?


요섭은 대답하는 대신 기광을 빤히 쳐다보았다. 높은 곳까지 올라온 사람치고는 그다지 지친 기색이 없는 눈이었다. 거미줄처럼 가늘게 얽힌 골목길 사이로 낮은 지붕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동네. 그중에서도 기광의 집은 거의 꼭대기에 매달려있었다. 하늘과 맞닿을 듯 끝이 안 보이는 계단을 오르며 양요섭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 국어 수행평가 있으니까 내일은 결석하지 마.


이번에는 기광이 대답 대신 요섭을 빤히 쳐다보았다. 대체 어디서 나온 친절인지 모르겠다. 한 학기가 다 끝나가도록 양요섭과는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반장이었으니까 으레 해야 할 말을 제외하면 흔한 인사 한 번 해본 적이 없다.


- 알아서 할 테니까 이제 가.


기광의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양요섭은 담벼락에 기대었던 등을 바로 세웠다. 거침없는 걸음으로 단숨에 가까이 다가온 요섭이 무언가를 내밀기에 얼결에 받아 들었다. 수업시간에 나눠 준 인쇄물이었다. 과목 별로 차곡차곡 정리된 종이 묶음을 황당한 얼굴로 내려다보던 기광이 눈썹을 찌푸렸다. 이게 나한테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나? 성의 없이 종이를 넘겨보던 기광이 한 페이지에 붙은 메모지를 떼어냈다. 알아보기 힘든 필체로 쓰인 숫자들이었다.


- 이건 또 뭔데?

- 내 번호. 연락망 수정해야 되니까 그 번호로 문자 보내 놔.


양요섭은 툭 던지듯 말하며 기광을 스쳐 지났다. 태연하게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하는 등을 바라보며 기광은 별 황당한 일도 다 있다고 생각했다. 고작 이것들 때문에 여기까지 올 필요가 있었을까. 분명 쓸데없는 짓이었다고, 시간 낭비였다고, 그 시간에 문제라도 하나 더 풀 걸 후회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기광은 등 뒤로 다시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들었을 때 기가 찬 얼굴로 휙 뒤돌아섰다. 뭐 할 말 남았어?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이려던 참이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충격이 뒤통수를 강타했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번쩍했다. 기광은 비틀거리면서도 넘어지지 않으려고 팔을 허우적거렸다.


- 기광아, 잘 지냈어?


익숙한 목소리에 소름이 쫙 돋았다. 아빠가 돈을 벌겠다고 사라진 후 기광의 앞에 정기적으로 나타나는 사람들이었다. 되도록이면 마주치지 않으려고 요령껏 피해다녔지만 이번엔 타이밍이 나빴다. 그러게 짐만 잽싸게 챙겨서 나왔어야 하는데. 양요섭 덕분에 일이 꼬였다.


- 오늘도 돈 안 보냈더라? 언제 주려고?

- 죄송해요, 제가 최대한 빨리...

- 헛소리 하지 말고.


억센 손에 머리카락이 붙잡혀 억지로 일으켜 세워졌다. 가끔은 학교까지 빠져가며 일을 하고 있었지만 돈은 매번 너무 금세 바닥이 났다. 아빠와는 자주 연락이 끊겼고 가끔씩 보내오는 돈은 그나마도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기광을 찾아오는 횟수도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기광은 두꺼운 손바닥이 뺨으로 내려쳐지기 전에 눈을 질끈 감았다. 고개가 휙 돌아가면서 입 안에 찝찌름한 것이 팍 터지는 게 느껴졌다. 불에 덴 것처럼 한 쪽 뺨이 금세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 맹랑한 새끼가 매번 꼭 이 높은 데까지 사람을 올라오게 만들어요.

- 며칠 안으로 입금할게요, 진짜예요, 돈 받는 대로..

- 그걸 또 언제 기다리고 앉았냐, 어? 장난해?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반대편 얼굴에도 충격이 왔다. 기광은 통증보다도 두려움 때문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오늘도 돈을 갚지 못한다면 저들이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당연히 수중에 돈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답이 없다. 도망쳐야 돼. 지난번처럼 걷지도 못할 만큼 맞고 있을 수는 없었다. 더 생각할 겨를도 없다. 기광은 잽싸게 튕겨져 나가 앞에 있던 덩치 둘의 사이를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기광은 그대로 대문을 빠져나와 계단을 한꺼번에 펄쩍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자신에게 익숙한 공간이었기 때문에 얼마간은 유리할 것이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 무작정 뛰긴 했지만 기광은 사실 확신이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동네를 빠져나갈 수는 있을까, 일을 더 크게 만든 건 아닐까. 언제 붙잡혀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불안함을 안고 모퉁이를 돌았을 때였다. 기광의 팔이 무언가에 채어잡혀 휙 당겨졌다. 헉. 가쁜 숨이 기광의 목구멍 뒤로 급하게 넘어갔다.


‘조용히 해.’


양요섭은 소리 없이 입술만 움직였다. 입과 코가 커다란 손바닥에 가로막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지만 기광은 그 말대로 했다. 요란한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긴장으로 눈도 깜빡할 수 없었다. 앞에 있는 양요섭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가까이 닿은 몸이 빠르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제 발소리는 코앞이었다. 양요섭이 바싹 다가왔다. 담벼락에 등이 닿아 있는 기광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초조한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혔다.


- 쥐새끼 같은 놈, 어디로 간 거야?!

- 아래쪽으로! 빨리!


고함소리가 멀어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어 한참 동안 양요섭의 까만 눈동자만 쳐다보고 있었다. 주변은 이제 완전히 고요했다. 기광은 그제서야 겨우 양요섭의 손을 치워낼 수 있었다. 부드러운 손바닥이 닿았던 입술을 손등으로 아무렇게나 문질러 덜 마른 핏자국을 닦아냈다. 바싹 닿아있던 몸이 떨어지자 열이 식으며 한기가 들었다. 기광은 무심코 어깨를 떨었다. 목을 빼고 골목 밖을 살피던 양요섭이 돌연 날카로운 눈을 했다.


- 괜찮아?

- 다 갔어?

- 괜찮냐니까.


양요섭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눈썹이 잔뜩 치켜 올라간 서늘한 표정이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기광은 태연한 척 굴려고 했다. 갑작스레 벌어진 한 밤의 추격전이 아주 사소한 우연인 척.


- 괜찮아, 덕분에 살았어.


기광이 그대로 몸을 돌리자 양요섭이 팔을 덥석 잡았다. 기광의 눈이 당황으로 커졌다.


- 너 미쳤냐? 그 상태로 어딜 가?

- 좀 넘어진 것 갖고 유난은.

- 어떻게 넘어지면 머리가 깨지는데.


대뜸 끌어당겨진 기광의 옷깃이 검붉은 피로 흠뻑 젖어있었다. 어쩐지 뭔가 좀 축축하더라니. 뒷머리를 스친 손바닥에도 피가 흥건히 묻어 나왔다. 양요섭은 재빨리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기광의 머리에 갖다 대었다.


- 병원부터 가자.

- 괜찮아, 별거 아니야.

- 이거 보고 말해.

- ..괜찮다고.


한참을 눌러도 지혈이 되지 않아 휴지가 금방 푹 젖었다. 별로 아프지도 않은데. 기광이 딴 생각을 하는 동안 양요섭은 한 손으로 이마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는 뒤통수를 꾹 눌렀다. 마디가 굵은 긴 손가락이 기광의 시야를 다 가렸다. 눈이 저절로 감겼다. 머리를 맞아서인지 상황에 현실감이 없었다. 양요섭. 너는 지금 왜 여기에 있을까. 곁을 스치는 셔츠 자락이 자꾸만 뺨 근처를 간지럽혔지만 기광은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기광은 종례가 끝나기가 무섭게 교실을 빠져나왔다. 담임이 자꾸만 쓸데없는 말을 해서 시간이 생각보다 늦어져 버렸다. 빠른 걸음으로 교문을 나서며 핸드폰을 힐끔거렸다. 그깟 수행평가가 뭐라고 꾸역꾸역 등교한 자신이 좀 우습게 느껴졌다. 어차피 성적은 개판일 텐데. 양요섭이 찾아오지만 않았어도 그런 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조금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기광은 양요섭이 어제 일을 모르는 척해주길 바랐다. 쓰러져 가는 낡은 집과 저를 죽일 듯이 쫓던 사람들, 머리에 생긴 상처 같은 것들 전부. 그것들은 기광을 지겹도록 따라다니는 꼬리표 같은 것이었다. 마음대로 떼어 버릴 수도 없다. 모르는 척한다고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쓸데없는 설명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기광.”


목소리를 무시한 채 계속 걸었다. 언제부터 뒤따라 왔는지 모르겠다. 가벼운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기광이 못 들은 척해도 양요섭은 계속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어느 순간 기광의 앞으로 불쑥 끼어들어왔다.


“머리는 좀 괜찮냐?”

“괜찮아.”


짧게 대꾸하고 곁을 스쳐가는 기광의 앞을 요섭이 또다시 가로막았다. 조금 장난스러워 보이는 얼굴을 보자 뭔가가 속에서 뜨끔하고 치밀었다.


“너 어제는..”

“양요섭.”


기광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꼭 이런 식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남의 일에 신경 좀 쓰지 마.”

“고맙다는 말 되게 예쁘게 하네.”


갑작스럽게 정곡을 찔리고 말았다. 허공에서 멈칫한 기광의 손을 보고 양요섭이 피식 웃었다. 그러자 입가에 작은 보조개가 패였다. 기광은 잽싸게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아직 고르지 못한 말이 턱 밑에서 맴돌았다.


“..어제는 고마웠어.”

“엎드려 절 받기냐.”

“그런 건 아니고.”

“됐어. 괜찮다니 다행이다.”


왜 저렇게 친절하게 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무시해주면 좋을 텐데. 그런데도 기광은 괜히 귓가가 뜨거워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약속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던 기분이 갑자기, 괜찮아졌다.


“..앞으로 담임한테는 대충 둘러대.”

“무슨 말이야?”

“이제 집으로 찾아오고 그러지 말라고.”

“기광아.”


퍽 다정하게 이름이 불리자 돌연 갈비뼈 안쪽이 뻐근해졌다. 기광은 대답하지 않고 시계를 힐끔거렸다. 이제 남은 시간이 별로 없었다. 먼저 갈게. 기광은 짧게 중얼거리고 걸음을 옮겼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차마 돌아 볼 수가 없었다. 시선이 얽히는 순간 들킬 것만 같아서. 땅을 밟는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큰 길까지 갔을 땐 거의 달리는 중이었다. 길가에 정차한 검은색 세단을 보자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늦었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감사합니다.”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반응이 돌아왔다. 제멋대로인 사람이라 종잡을 수가 없다. 기광은 조용히 숨을 고르며 안도했다. 남자가 지시하자 차는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다렸다는 듯 남자의 입술이 다가와 기광의 목덜미를 집어삼켰다. 기광은 얌전히 굴었다. 그래야만 했다. 남자의 뒤로 보이는 창밖에 양요섭의 옆모습이 스쳐지나고 있었다. 조금 창백하게 굳어있는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기광은 눈을 질끈 감았다. 남자의 손이 교복 셔츠 아래로 불쑥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기광의 숨이 다시 가빠졌다. 남자는 이를 세워 기광의 귓불을 깨물며 조금 웃었다. 기광은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왜 자꾸만 양요섭이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 계단. 기광은 아득하게만 보이는 꼭대기를 쏘아보며 힘겹게 다리를 움직였다. 텅 빈 하늘에 달 하나만 덩그러니 떠있는 밤이었다. 그런데도 아직 기광의 하루는 끝나지 않았다. 집 앞에 양요섭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모르겠다. 담벼락에 비스듬히 기대서있는 모습이 처음과 겹쳐졌지만 그때처럼 무덤덤한 얼굴은 아니었다. 언젠가 봤던 것처럼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 기광이 가까이 다가가자 고개를 드는 요섭의 얼굴에 푸른색 달그림자가 생겼다.


“어디 갔다 와?”

“여긴 또 왜 왔어.”


그대로 곁을 스쳐 지나려다 손목을 붙잡혔다. 양요섭은 은근히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찾아오지 말라고 한 게 불과 몇 시간 전인데. 양요섭이 이마로 쏟아져내린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쓸어올리며 말했다.


“어디 갔다 오냐고.”

“..일하고 와, 됐냐? 이제 좀 가.”

“무슨 일인데?”

“가라고.”

“아까 너 누구 차에 탄 거야?”

“못 들었어? 다시 말해 줘? 꺼지라고.”


지친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그럴 법도 했다. 남자는 오늘 작정을 한 것 같았다. 차 안에서는 관대하게 굴었지만 방에 도착하자 태도가 변했다. 기광이 겁을 집어먹고 뻣뻣하게 굳자 억지로 술을 먹이고 팔을 묶은 채 더는 신음도 나오지 않을 때까지 밀어붙였다. 기광은 도무지 거부할 수가 없었다. 아빠가 사라지고 기광이 코너로 내몰릴 때마다 반복되는 만남들이었다.


“기광아.”


기광은 가까운 거리에서 저를 부르는 양요섭을 쏘아보았다. 일부러 사납게 구는 말도 양요섭에게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오히려 비틀거리는 건 기광이었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와 걱정 섞인 눈동자에 또 가슴 안쪽이 뻐근해졌다.


"제발 신경 꺼. 내가 누굴 만나서 뭘 하든 너랑 상관없어.”

“그렇게 말하면 좀 편해? 걱정하는 거잖아.”

“내 걱정을 니가 왜 하는데.”


말이 끝나자마자 벽에 등이 밀쳐졌다. 양요섭이 아주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너무 세게 붙잡힌 바람에 피가 통하지 않는 손목이 저릿저릿했다. 기광은 크고 까만 눈동자를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서늘하다 생각했던 눈은 가까이에서 보자 뜨거운 열기로 일렁이고 있었다. 기광은 나직하게 물었다.


“너. 나 좋아해?”

“..잘 몰라.”

“근데 왜..”


기광의 말이 양요섭의 입술에 막혔다. 가까운 거리만큼의 무게가 기광의 입술에 닿으며 부드럽게 뭉개졌다. 기광은 눈을 감았다. 갑작스럽게 포개진 입술 사이로 요섭의 매끄러운 혓망울이 천천히 파고들었을 때 기광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입을 벌렸다. 불덩어리를 삼킨 것처럼 목구멍 안이 뜨거웠다. 요섭이 아랫입술을 빨아당기자 민감한 속살이 말랑하게 짓눌리며 열기가 몰렸다. 기광은 두 팔을 들어 요섭의 목뒤에 감고 끌어당겼다. 요섭의 손바닥이 뺨을 스르륵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뜨거웠다. 얼굴로 쏟아지는 숨도,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는 입술도.


하아..하.


틈이 생기자 누구의 것인지 모를 숨이 가쁘게 오갔다. 얼굴이 데인 듯 뜨겁고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지만 아까부터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인기척을 더는 무시할 수가 없었다. 기광은 감았던 눈을 떴다. 좁은 거리에서 열이 들뜬 시선이 얽혔다. 가까스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뛰어.”

“뭐?”


양요섭은 헐떡이며 되물었다. 달을 등진 얼굴이 저와 다를 바 없이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가야 돼, 당장.”


다급하게 속삭인 기광은 양요섭을 어둠 속으로 밀어 넣고 몸을 숙였다. 계단 아래쪽에서 들리던 인기척이 금세 지척까지 왔다. 여러 명의 발소리였다. 기광은 그들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담벼락 아래에서 심각한 표정의 양요섭과 눈이 마주쳤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었다. 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시멘트를 대충 썰어 만든 계단을 훌쩍훌쩍 뛰어넘는 양요섭의 뒷모습은 이 동네와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았다. 꼭대기가 하늘과 맞닿은 동네. 계단을 한꺼번에 몇 개씩 건너뛰는 양요섭의 뒤로 별이 총총히 박힌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덕분에 하늘을 걷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기광이 몇 걸음 뒤처지자 가던 길을 되돌아와 손을 내미는 양요섭의 뺨 위로 달빛이 잘게 부서졌다.


“괜찮아?”


말없이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양요섭은 기광의 손을 잡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이상한 밤이었다. 저를 쫓는 사람들을 피해 도망치는 중인데도 가슴에 무언가가 파도처럼 밀려 들어와 기분을 부풀려놨다. 고작 함께 있을 뿐인데 모든 일이 괜찮아질 것 같은 밤. 기광은 양요섭의 손을 세게 잡아보았다. 너는 왜 여기 있는 걸까. 눈이 마주치자 양요섭이 웃었다. 기광은 그제야 알았다. 너는 나한테 웃어주려고 여기 있는가 보다.






아름다운 밤이야.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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